간송문화(澗松文華) 展

 

'문화로 나라를 지키다'

 

국보 제70호_훈민정음

 

 

DDP 배움터 내 디자인박물관(2층)

 

 

제 1부 간송 전형필 : 2014. 3. 21(금) ▶ 2014. 6. 15(일)

제 2부 보화각 : 2014. 7. 2(수) ▶ 2014. 9. 28(일)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 281 지하철 2, 4, 5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 T. 02-2266-7077

 

www.ddp.or.kr

 

 

주요 전시작가 | 단원 김홍도 | 혜원 신윤복 | 현재 심사정 |

 겸재 정선 | 추사 김정희 | 오원 장승업 | 윤덕희 등

 

국보 제65호_청자기린유개향로

 

 

2013년 8월에 설립된 간송미술문화재단은 올해 3월 21일부터 DDP 배움터 2층 디자인 박물관에서 재단설립 기념 전시회를 개최한다. 간송미술문화재단이 이 장소에서 전시하려는 배경에는 우선 서울시가 우수한 컨텐츠를 확보하려는 의지가 강했고, 간송미술문화재단 역시 대규모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현대적 전시장소를 강력히 바랐기 때문이다. 소프트웨어 파워와 하드웨어 파워의 절묘한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전시회는 "文化保國, 문화로 나라를 지키다"라는 정신을 끝없는 노력으로 실천해낸 간송 전형필 선생의 명품 컬렉션 전시회이며, 전시제목은 큰 주제로서 『간송문화』이고 1부와 2부로 나누어서 각각 「간송 전형필」, 「보화각」으로 진행된다. 1부는 간송이 주요 수집일화들을 중심으로 우리 문화재를 모은 이야기를 스토리로 풀어내는 전시이며, 2부는 간송이 모은 간송미술관 수장품들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주요 소장품들을 장르 별로 나누어 전시하는 명품전이다. 이 전시회의 주요 골자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 간송 전형필의 평생을 통한 우리문화재 수집행로를 다섯 가지 섹션으로 나누어서 시기별 소장 유물을 주요작을 중심으로 망라하였음.

2. 『훈민정음』의 최초 대중전시

3. 국보로 지정된 삼국시대 불상 전시 「금동삼존불감」,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 「금동보살입상」

4. 삼원삼재의 대표작 다수 전시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 현재 심사정,  겸재 정선 등)

5. 현재 심사정의 국보급 「촉잔도권」의 최초 전면 공개

6. 존 개스비로부터 1936년 인수한 고려청자 명품 컬렉션 전면 공개 (「청자모자원숭이형연적(국보 제270호)」, 「청자오리형연적(국보 제74호」, 「청자상감연지원앙문정병(국보 제66호)」, 「청자기린유개향로(국보 제65호)」

7. 전시 중 혜원 신윤복의 『혜원전신첩』에 수록된 30점 풍속화 최초로 전면 공개

 

 

 

국보 제68호_청자상감운학문매병    

 

 

간송미술문화재단은 이번 전시를 계기로 시대적 조류에 맞추어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다양한 기획전을 DDP 디자인 박물관에서 계속해서 진행할 계획이다. 이와 동시에 간송미술문화재단은 간송미술관 수장품의 보존활동을 보다 현대화하는 동시에, 연구활동을 더욱 활성화하여 학술 연구로 우리 민족문화발전에 계속해서 이바지 할 뿐 아니라, 중장기 계획으로 규모 있는 현대식 미술관과 연구소, 종합문화관을 건립하여 후대의 민족문화예술 연구가 지속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려 하고 있다.

재단의 미래 비전에 대해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간송 콜렉션에 대한 아카이빙, 보존, 연구활동

2. 보화각 건물의 유지보수 및 정비

3. 간송미술관 상설전시관과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신축

4. 서울디자인재단과의 공동전시를 통해 2014년 3월부터 3년간 다양한 기획전 개최

5. SBS, NAVER등의 파트너사들과 다양한 문화사업 진행

6. 민족문화예술 연구와 진흥을 위한 저술활동, 학회, 발굴, 장학사업

7. 서울 도봉구 방학동 간송고택(등록문화재 521호)과 간송묘역 문화공원 조성

8. 수도권 이외 지역에 민족문화 창달과 교육을 위한 지방 분관 설립

 

 

 

국보 제66호_청자상감연지원앙문정병

 

 

1부: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

 

1906년에 태어나서 1962년 타계한 우리나라의 대표적 노블리스 오블리제 간송 전형필 선생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역사적 물결에 자신의 운명이라는 배를 띄우고 항해하였다.  간송은 우리나라 문화계의 중심 인물들과 교류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시대적 책무를 깨달았다. 선조들이 남겨놓은 문화재를 지키고 보존하는 일이었다. 문화재야말로 일제에 의해 한없이 왜곡된 우리 역사와 전통 문화를 복원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열쇠라는 것을 확신했다. 이른바 ‘문화적 독립운동’이었다.

간송이 태어난 지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간송이 걸었던 길을 따라 역사적 교훈을 얻고, 나아가 오늘날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함께 생각하고 느끼고자 한다. 우리는 현재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웠던 과거 속의 의인을 조명하면서 새롭게 다가오는 역사의 물결에 대비해야만 한다.

간송은 1930년대부터 타계의 시기인 1960년대 초반까지 민족 문화재를 수호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 이야기는 20대 후반인 1933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한남서림과 경성미술구락부를 주요 경로로 일본인들에 당당히 맞서며 우리 문화재를 지켜냈고,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갯스비의 고려청자 컬렉션과 야마나카 상회가 소장하고 있던 《혜원전신첩》을 되찾아 왔다. 그리고 1940년, 『훈민정음』을 수장하는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간송의 문화재 수집과정이 숨가쁘게 전개된다.

이는 간송의 개인사적 이야기에 머물지 않는다. 극적이고 감동적인 간송의 역정은 근현대사의 역경과 영광의 순간들과 더불어 전개되기 때문이다. 중첩된 두 가지 이야기를 통찰하면서 우리는   과거의 교훈을 바탕으로 새로운 비전을 찾아야만 한다.

 

『간송문화(澗松文華)』 1부: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 다섯 섹션에 대한 설명

 

※ 『간송문화(澗松文華)』: 1부 「간송 전형필」은 총 다섯 개의 섹션으로 전시 주제가 나누어져 펼쳐진다.

 

 

 

국보 제294호_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

 

 

1. 간송 이야기

간송이 우리에게 남긴 유물은 두 가지로 대별된다. 먼저 간송이 수집하고 보존한 선조들의 문화 유산이 그것이다. 또 다른 유물은 간송 자신의 삶과 예술을 보여주는 유물들이다. 여기에는 비망록, 친필 에세이, 사진, 문구, 서화와 도자, 전각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유물들에는 간송의 꿈과 삶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간송의 폭넓은 교유관계도 알려준다 간송의 교유는 우리나라 고미술 연구의 중핵을 이루고 있는 원로 학자, 문학가, 한학자는 물론 멀리 치바이스(齊白石)와 같은 외국인 예술가, 존 개스비와 같은 국제 변호사까지 뻗쳐있다. 이 유물들은 간송이 우리 문화를 지켜내기 위해 쏟은 열정과 노력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가 살았던 시대 상황과 문화계의 이면들을 가감 없이 전달해주고 있다.

간송이 직접 남긴 작품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간송이 예술가를 자처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추사 김정희의 학맥을 이은 위창 오세창의 제자답게 어느 예술가 못지 않은 탄탄한 기초와 빼어난 감각을 소유하고 있었다. 품격과 기량을 겸비한 자작 서화와 도자들이 이를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예술에 전업하지는 않았지만, 여기로 서화를 사랑하고 즐기던 그의 모습에서 전통적인 문인 예술가의 풍모를 엿볼 수 있다.    

 

2. 길을 열다

간송은 민족의 시련기에 자신이 사랑하는 우리 문화재를 모으고 연구했다. 그런 과정에서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당시 최고의 금석학자 위창 오세창을 비롯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미술가 고희동,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건축가 박길룡, 최고의 거간 이순황, 화가인 청전 이상범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간송은 1933년, 겸재 정선의 《해악전신첩》과 현재 심사정의 대표작 <촉잔도권>을 수집한다. 겸재 정선은 율곡 이이 계열의 문인으로 당대의 시대정신을 완벽하게 형상화시킨 진경산수화의 정립자다. 《해악전신첩》은 정선이 72세에 금강산 일대를 유람하고 그려낸 최절정기의 대표작 21점이 들어있다. 심사정은 중국 남종화풍의 토대 위에 조선 고유의 감각을 접목시킨 조선남종화풍을 창안하여 조선후기 화단의 한 축을 담당했던 문인화가다. <촉잔도권>은 길이가 무려 8미터에 이르는 대작으로 심사정의 절필작이다.

그 이듬해인 1934년 간송은 조선후기 최고의 수장가로 꼽히는 석농 김광국이 안견, 강희안, 신사임당, 이정, 조영석 등 역대 명화가들의 작품을 모아 꾸민 《해동명화집》을 구입한다.

이 섹션의 정수는 1935년 일본인 거간 마에다 사이이치로(前田才一郞)로부터 천신만고 끝에 구입한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이라 할 수 있다. 장쾌한 남성미와 세련된 여성미가 동시에 구축된 고려시대 최고의 명품 상감청자이다.

 

3. 지켜내다

1934년부터 해방까지 간송이 유물 수집의 주요 경로로 활용했던 경성미술구락부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10년은 일제가 우리 문화재의 수집과 반출에 더욱 열을 올렸던 시기였다. 경성미술구락부는 야마나카 상회와 더불어 민족 문화재가 해외로 반출되는 전진기지였다.

간송은 우리 문화재를 지켜내기 위해 경성미술구락부에서 지난한 투쟁을 거듭한다. 조선 시대 서화부터 고려의 청자, 조선의 백자 등이 해외로 반출되는 사태를 막고자 막대한 가산을 투입했고, 은사 위창 오세창과 춘곡 고희동과 함께 우리나라 문화유산에 대한 연구를 심화시켜나갔다.

이 섹션에서는 간송이 경성미술구락부를 통해 수장한 서화, 고려 청자, 조선 백자 스무 점이 주를 이룬다. 이 중 가장 눈에 띄는 유물은 국보 제294호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으로 경성미술구락부 사상 최고의 낙찰가를 기록한 작품이자 조선 백자를 대표할 만한 최상의 명작이다. 동채, 철채, 청화, 그리고 음각과 양각이 한 작품에서 이렇듯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예는 일찍이 찾아볼 수가 없다.   

이밖에 청자 연적과 조선 백자 궤, 청화백자 연적 등은 물론이고, 겸재 정선, 화재 변상벽, 추사 김정희, 오원 장승업 등 경성미술구락부를 통해 수집한 조선 최고의 서화 대가들의 그림과 글씨가 전시된다.

 

4. 찾아오다

간송은 1936년, 일본으로 건너간다. 일본에서 활동하던 영국인 국제 변호사 존 개스비(Sir.  John Gadsby)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개스비는 영국의 귀족 출신으로 예술을 좋아하고 아끼던 가정에서 나고 자라 뛰어난 예술적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개스비가 진정으로 사랑하고 감동받았던 예술품은 다름 아닌 고려 청자였다. 그는 20여 년 동안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 고려청자를 수집했다.

1936년, 국제 정세에 밝았던 개스비는 일본의 야욕과 패망을 예견하고 영국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한다. 그 동안 심혈을 기울여 수집한 고려청자는 처분하고자 했다. 이 소식을 들은 간송이 개스비를 찾아갔고, 간송의 민족과 예술에 대한 사랑과 진지함을 확인한 개스비는 애장해오던 고려청자들을 간송에게 넘겨준다. 국보 제65호 <청자기린유개향로>, 국보 제66호 <청자상감연지원앙문정병>, 국보 제74호 <청자오리형연적>, 국보 제270호 <청자모자원숭이형연적> 등이 그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1936년에는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첩인 《혜원전신첩》을 되찾아 오기 위해서 오사카 ‘야마나카 상회’를 방문하기도 했다. 간송이 수집한 이 화첩은 이제는 너무나 유명한 <월하정인>, <단오풍정>,  <쌍검대무> 등이 수록된 화첩으로 현재 국보 제135호로 지정되어 있다. 혜원의 탁월한 감각과 필치는 물론, 조선 후기 최상류층들의 생활상과 이면 세계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걸작이다.

 

5. 훈민정음

『훈민정음』은 한글을 만든 이유와 원리 그리고 사용법을 설명한 책이다. 이 책은 한글이 백성을 위하여 만들었고, 인체의 발음기관의 발성 형상을 토대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려준다. 백성을 위해서 글자를 기획하여 창제한 예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일이며, 특히 창제의 목적과 제자 원리가 이처럼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경우는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1940년 7월 어느날 간송은 대수장가의 예리한 감각으로 길거리를 바삐 오가는 거간의 동태가 예사롭지 않음을 직감하였다. 훈민정음 원본이 출현한 것이다. 간송은 거간이 원하는 금액의 열 배를 주고 훈민정음을 구하여 민족문화의 원천이 되는 간송 수장품의 백미로 맞아들였다.  

『훈민정음』은 크게 본문과 해례로 나뉘어 있다. 본문은 세종이 직접 창제 의의를 밝힌 서문과 초성 17자와 중성 11자를 차례로 예시하고 설명한 예의로 이루어졌다. 한글을 만든 이유와 한글의 사용법을 간략하게 설명한 글이다. 해례는 성삼문, 박팽년 등 세종을 보필하여 한글을 만들었던 집현전 학사들이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만든 원리와 용법을 상세하게 설명한 글이다. 우리가 국어 시간에 배웠던 "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로 시작되는 문장은 예의의 첫머리에 있는 서문을 우리말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서문을 포함한 예의 부분은 간략하여 『세종실록』과 『월인석보』 에 실려 전해져 왔지만, 한글 창제 원리가 밝혀져 있는 해례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런데 본문과 해례가 모두 실려 있는 훈민정음 정본이 1940년에야 발견된 것이다. 그것이 이 『훈민정음』이다.  『훈민정음』이 학자들과 일반 대중에게 공개된 것은 해방 후에 이르러서였다. 1962년 12월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국보 제270호_청자모자원숭이형연적

 

 

2부: 「보화각(華閣)」

 

보화각은 간송 선생께서 1930년대 초반부터 기획하시고 1938년에야 준공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사립미술관이다. 보화각은 삼국시대부터 근?현대까지의 우리나라 고미술이 보존되고 연구된 고미술사학의 요람인 동시에 위창 오세창, 춘곡 고희동, 삼불 김원룡, 혜곡 최순우, 수묵 진홍섭, 초우 황수영, 박길룡, 청전 이상범 등 우리나라 근대기에 문화?예술계의 총아들이 모여서 사상과 세계관을 교류하던 집결지이기도 했다.

간송 선생께서는 일반 수집가와 사뭇 다른 길을 걸으셨다. 유명하고 값이 나가거나 앞으로 유망할 고미술만을 수집하지 않으셨다. 우리나라의 고미술이 시작되어 끝나는 알파와 오메가 사이의 모든 유물을 수집하여 정리하고자 하셨다. 우리나라 고미술에 대한 선적 역사(linear history)의 정밀한 수립은 우리나라 정신사에 대한 쾌거인 동시에 우리나라 문화의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거울을 마련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간송 선생께서 보화각을 준공하면서 준비하셨던 대계가 바로 이것이었다.

2부 「보화각」에서는 「금동삼존불감」,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 「금동여래입상」 등 7세기 삼국시대 불교미술에서 웅혼하면서도 섬세한 불교정신을 느낄 수 있다. 역시 고려시대의 귀족적 감각의 구현체라 할 수 있는 고려청자와 조선의 담백한 서민정서의 백자 사이에서 또 다른 특별한 존재감을 표현하는 분청사기를 만날 수 있다. 한문을 정확히 읽도록 권장하며 표준음을 제시한 조선초기의 문법서 『동국정운』, 조선 선조 때의 거문고 악보 『금보』에서는 조선의 합리적 문화정책과 문화사상을 엿볼 수 있다. 시서화로는 조선의 전 시기를 가로지르며 일관되게 흐르는 시대정신과 만날 수 있다. 그것은 자연을 존중하며 현세의 합리성을 권장하면서 모든 계층의 화합을 이루려던, 건전하며 예민한 우주관이자 인간관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안평대군, 석봉 한호, 탄은 이정, 공재 윤두서, 겸재 정선, 원교 이광사, 현재 심사정,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긍재 김득신, 추사 김정희, 정명공주 등 역사 속의 인명과 만나면서 시대정신과 소통하게 된다.

 

 

 

국보 제135호_신윤복 혜원전신첩 중 단오풍정

 

 

간송 전형필은 누구인가?

 

간송 전형필은 한국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간송은 1906년 종로 4가에서 당대에 손꼽히는 부호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자신의 유복한 운명을 즐길 수만은 없었다. 어린 시절 양부와 친부, 친형 등 가족들을 연이어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어야 했고, 식민 지배를 당하는 민족의 운명에 대한 울분 때문이었다.

간송은 이토록 어려운 시절에 책을 벗삼아 학문에 정진하면서 미래를 기약했다. 그러던 중 1920년대 와세다대학을 다닐 때, 위창 오세창 선생을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간송의 휘문고보 은사 고희동이 소개를 해준 덕이다. 위창 오세창은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고, 추사 김정희의 학맥을 이어받아 전통문화에 대한 해박한 식견과 탁월한 서화 감식안을 지니고 있었다. 위창은 간송에게 전통문화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고미술에 대한 혜안을 깨우쳐준다. 이를 계기로 간송은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이후에 본격적으로 고미술품 모으기 시작한다.

 

간송이 문화재를 지켜내는 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가장 큰 이유는 ‘문화적 독립’의 중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간송은 문화재를 지켜내는 일이 민족의 미래가 걸린 가장 시급한 일임을 확신했다. 미술은 아름다운 감상의 대상이다. 그러나 단순한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불가사의한 힘을 지니고 있다. 과거 선조들이 살았던 시대의 생생한 삶과 정신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선조들의 마음을 직접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창문이고, 전통과 현재를 이어주는 다리인 것이다. 간송은 문화재를 이민족에게 절대로 빼앗겨서는 안 되는 우리 정신 그 자체라고 여겼다. 현재는 과거로부터 이어지며 미래 역시 현재로부터 이어진다. 과거가 없으면 미래도 없다.

 

간송은 남몰래 미술관 건립을 준비한다. 1938년 현재의 서울 성북동에 ‘보화각’을 준공한다.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첫째, 민족 독립의 확신 없이는 이런 큰일을 진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우리나라의 독립을 확신했다. 또 다른 이유는 삼국시대부터 당대에 이르는 전통문화 각 분야의 문화재를 수집하여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위함이었다. 여기에서 간송의 비범함을 읽을 수 있다.

이렇듯 간송의 수집 역사는 우리나라 근현대 역사의 물결과 맞물려 진행된다. 그렇기에 지금까지도 전설 같은 이야기가 많이 전해온다. 초기 수집 이야기로는 친일파 송병준의 후손으로부터 겸재의 득의작 《해악전신첩》을 구한 이야기, 현재 심사정의 대작 <촉잔도권>을 구입한 후에 거금을 들여 복원했던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후 간송은 일본으로 건너가 영국인 귀족으로부터 당시 아시아 최고의 고려청자 컬렉션으로 인정 받던 ‘개스비 컬렉션’을 양도 받는다. 또 야마나카 상회로부터 조선 풍속화의 명품 《혜원전신첩》을 되찾아 온다. 가장 극적인 수집 일화는 1940년 『훈민정음』 구입이었다. 해방 이후 간송은 『훈민정음』을 한글학회에 공개하여 본격적인 한글 연구의 물꼬를 트기도 한다. 민족 문화 수호자로서의 집념과 선각자의 예리한 통찰력이 빚어낸 결실이었다.

간송은 1942년 어려움에 처한 민족학교 보성고보, 즉 현재의 보성 중고등학교를 인수하면서 민족 정신의 도도한 흐름을 굳건히 지켜냈으며, 해방 및 전후에 전통 문화재의 과학적이면서도 체계적 연구, 그리고 교육대계의 장기적 비전을 후대에 전해주었다. 개인적 영달을 욕심내지 않고 민족을 우선적으로 사랑했던 이 의인은 1962년 57세의 아까운 나이에 타계한다.

 

 

국보 제135호_신윤복 혜원전신첩 중 월하정인

 
 

 

 

 
 

vol.20140321-간송문화(澗松文華)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