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SD갤러리 기획 초대전

 

艾柅 이주연 展

 

" 힘내요! 페이퍼맨 "

 

Leaving Tomorrow_90x60cm_Woodcut_2015

 

 

한국예탁결제원 KSD갤러리

 

2016. 4. 15(금) ▶ 2016. 5. 24(화)

Opening 2016. 4. 21(목) PM 5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나루로4길 23 | T.031-900-7449

 

https://gallery.ksd.or.kr

 

 

Marathon_22.5x60cm_Linocut_2016

 

 

 

현실을 건너는 이상주의자들

_ 이주연의 페이퍼맨을 위한 필로소피(philosophy)

 

자기 속에서 타자를 발견함으로써 우선 나를 나 자신 속에 확립시킬 수 있습니다. … 그리하여 나는, 나와 다른 사람들,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의 사이에 가능하게 된 만남의 무수한 경험들을 향하여 나를 열게 됩니다.                                                   _ 줄리아 크리스테바, 『사랑의 정신분석』중에서

 

작품 사진을 받아서 보았죠! 저는 그 중에서 두 번째로 보내온 이미지에 화들짝 놀랐어요. 그 전에 보았던 것들은 대부분 페이퍼맨들의 얼굴에서 어떤 삶의 표정들을 읽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표정에서 다시 미학적 상징을 들춰내기도 했고요. 그런데 이 작품은 무릎아래의 발이 핵심이더군요. 어딘가를 향해서 ‘걷는 발’ 말예요. 가로로 긴 검은 화면의 상단에 걷는 발이 걸렸으니 그 밑은 ‘현실’이겠죠. 그 검은 바탕이 비루한 현실의 상징이라고 해서 먹먹하다느니 참혹하다느니, 그런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아요. 현실의 그림자는 주인공의 행동에 따라 언제든지 바뀌는 것이니까요. 걷는 발을 생각해 볼까요? 다비드 르 브르통이 말하기를, 걷는다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라고 했어요.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는 거죠. 그러니 그 밑의 그림자가 어둡다고 해서 비관할 필요는 없는 거예요. 조지프A. 아마토 또한 걷기는 인간과 세상의 대화라고 주장했고요. 심지어 발자크는 우리 모두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기도 했어요. “인류가 첫발을 내디딘 이래 왜 걷는지, 어떻게 걷는지, 걸어본 적이 있는지, 더 잘 걸을 수 있는지, 걷기를 통해 무엇을 이룩할 수 있는지 자문해본 이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정말 굉장하지 않은가. … 이 세상을 차지하고 있는 모든 철학적, 심리적, 정치적 시스템과 연결돼 있는 질문들인데” 자, 그렇다면 지금 걷고 있는 저 페이퍼맨은 누구일까요? ‘걷기’가 하나의 언어라고 할 때 자신의 걷기를 선택한 저들은 무엇을 향해 걷는 것일까요? 그들도 그들의 실존을 고민하면서 행복한 감정을 되찾고 있는 것일까요? 저는 천천히, 느리게, 저 발들을 따라가 보았어요. 앞을 걷는 자, 중간을 걷는 무리들, 그리고 뒤에서 조용조용 걷는 자. 그림 속의 상황을 상상하다가 불현 듯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이 떠오르더군요. 세일즈맨 윌리의 삶과 큰아들 비프의 고백 따위가 귓가에서 윙윙 거렸어요. 그러다가 그들의 사소하면서도 날카로운 대화들이 박혔죠.

 

“그래, 젠장, 인생은 짧고 그저 한두 마디의 농담거리일 뿐이지.”

 

 

Moon Rise_45x60cm_Linocut_2016

 

 

우리가 아는 ‘OO맨(땡땡맨)’의 전설은 대부분 헐리우드에서 탄생했지요. 최근에 개봉한 슈퍼맨과 배트맨이 그렇고, 스파이더맨, 엑스맨, 아이언맨이 그래요. 그들은 영웅 신화에 빗대어 탄생한 ‘초인(超人)’일 거예요. 그렇지만 그 초인들의 현실은 놀라울 정도로 생생한 ‘허구적 현실’에 불과하지요. 그들은 스크린 안에서 현실을 구원할 뿐 단 한순간도 스크린 밖으로 뛰쳐나와 살아있는 리얼리티를 확보하지 못해요. 최약체로 꼽히는 버드맨도 마찬가지죠. ‘OO맨’의 ‘OO’을 채우는 슈퍼, 배트, 스파이더, 엑스, 아이언, 버드의 이미지들에는 이미 영웅의 얼굴이 숨어 있어요. 그런데 ‘페이퍼’는? 영웅의 신화는 대체로 이원적 가치관을 가지고 태어나요. 잠깐 그 이야기를 하고 넘어갈게요. 고대 영웅 신화 속 주인공들은 대부분 남성성이에요. ‘남자’라거나 ‘남성’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상대하는, 아니 그들이 반드시 물리쳐야만 하는 괴물과 어떤 무의식의 작동이 ‘여성성’과 맞물려 있기 때문에 그래요. 주지하듯 대체로 서구의 신화 속 영웅들은 ‘용’이라는 괴물을 물리치죠. 그런데 정신분석학에서 그 용이라는 괴물은 여성성과 관련이 있고, 인간의 무지나 무의식으로 해석해요. 자, 그러니 영웅들이 맞서 싸우는 용과 그 싸움에서의 승리는 무지의 공포로부터 벗어나는 일이기도 하죠. 이때, 용이라는 여성성의 의미는 ‘낯선 존재’로서 비합리적이며 비이성적인 것으로 규정한데서 비롯해요. 이런 해석에는 남성성을 ‘기준 질서’로 보는 가부장적, 혹은 남성중심의 편파적 관점이 투영되어 있는 거예요. 페이퍼맨들도 그런 영웅 신화의 이야기 구조를 따르고 있는 것일까요? 페이퍼맨도 일정부분 영웅 신화의 구조를 갖기는 해요. 예컨대 그들은 그들을 억압하는 무의식과 싸우죠. 그들이 극복해야 할 괴물은 참으로 만만찮아요. 정말이지 너무 힘든 상대예요. 왜? 바로 ‘현실’이니까요. 현실은 용처럼 눈에 보이는 신비의 괴물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실증적 괴물이어서 더 그래요. 그리고 현실이라는 괴물도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일 때가 아주 많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헐리우드 영웅 신화 속 ‘OO맨’과 페이퍼맨의 다른 점은 페이퍼맨은 결코 자신의 현실에서 초인이 되기 힘든 구조 속에 갇혀 산다는 거예요.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친구 찰리는 주인공에게 이렇게 거들먹거리죠.

 

“자네가 하워드라는 이름을 지어 줬지만 그런 건 어디 팔아먹지도 못하는 거야.

이 세상에서 중요한 건 팔아먹을 수 있는 것들이야. 명색이 세일즈맨이면서

그런 것을 깨닫지 못하다니, 우스운 일이로군.”

 

 

Drink UpⅠ_40x30cm_Linocut_2016

 

 

페이퍼맨들이 노란 달을 향해 뛰어 오르는 작품에서 저는 거의 눈물이 날 뻔 했어요. 그들의 눈에는 자본주의의 황금색 달로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저 노란 달이야말로 그들의 심연에 떠오른 ‘참나(眞我: 다석 류영모 선생은 이 참나를 ‘얼나’라고 말씀 하셨죠!)’의 어떤 표상처럼 보였거든요. 우리는 우리 마음에 ‘우물’ 하나씩은 다 가지고 살지요. 아직 모르고 있거나 알았어도 잊었을 가능성이 커요. 그 우물이 뭐냐고요? 혹시 윤동주의 시 <자화상>을 기억하나요? 그 시에 우물 속을 보는 ‘나’가 있어요.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쳐지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로 이어지는 시구를 보세요. 여기에서 ‘우물’이 갖는 상징은 독특해요. 우물은 여러 나라의 문화에 따라 처녀성과 어둠과 치유, 그리고 순례와 구원을 뜻하지요. 순례와 구원이라고요? 그래요. 그 상징은 주로 성서와 같은 종교적 에피소드에서 볼 수 있어요. 그런 우물을 들여다보는 행위는 명상이라는 신비한 심리적 태도를 상징하고 그런 점에서 우물은 또 영혼을 상징하기도 하죠. 윤동주의 ‘자화상’에서 그런 심리적 표상을 읽을 수 있어요. 그런데 페이퍼맨들은 우물 속을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아예 뛰어들고 있죠. 현실을 비추는 우물면의 위가 아니라 심연(深淵)이라는 깊이로 뛰어 들어간 페이퍼맨들은 윤동주가 그렸던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쳐지고 파아란 바람이’ 부는 어딘가에 있을 게 분명해요. 이주연이 그리는 페이퍼맨의 상징체계는 이렇듯 반어법과 정반합으로 마치 선문답하듯 대화를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의 작품들은 겉으로는 세일즈맨의 고통스런 수다를 닮았으나, 그 내부로 들어가면 어느 새 심리적이고 은유적인 표상들과 ‘마주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일까요? 사실 그의 작품들의 거개는 ‘서로주체성’을 향한 관계의 따듯함이 배어 있다고 할 수 있어요. ‘홀로주체성’과 대비되는 셈이죠. 서로주체성은 나와 너를 구분하지 않는 ‘우리’라는 관계에서 비롯된 철학적 개념이에요. 설령 그림 속의 페이퍼맨이 혼자일지라도 그는 항상 무언가를 잡고 있거나 기대고 있으며, 무언가와 마주하고 있죠. 그가 ‘완전히’ 홀로 서 있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저는 이런 페이퍼맨의 태도에서 우물 속으로 뛰어드는 페이퍼맨의 초상과 만나게 돼요. 그들은 다른 주체가 아닌 것이죠. 페이퍼맨은 ‘모두’를 상징하는 다수의 복수 주체성을 가지고 있지만, 낱낱으로 볼 때는 그들 모두가 다 개인들이죠. 상징체계로는 ‘하나(단수)’와 ‘둘(복수)’을 구분하면서 동시에 서로 구분하지 않는 카오스모스적인 주체라고 해야 할 거예요. 저는 이런 특이한 상징성이 음양론과 삼태극론을 가졌던 동아시아의 문화적 상징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봐요. 즉 이수분화와 삼수분화의 문화적 코드가 흥미롭게도 이주연의 페이퍼맨들에게서 재현되고 있다는 것이죠.

 

 

Top of the world_40x30cm_Linocut_2016

 

 

“제발 절 좀 놓아주세요, 예? 더 큰일이 나기 전에 그 거짓된 꿈을 태워 없앨 수 없나요?”

 

저는 페이퍼맨을 만나고 난 뒤 그에게 자유를 주고 싶더군요. 그를 놓아주고 싶었단 얘기에요. 그러기 위해서는 그가 누구인지 깊게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어요. 그의 현실적 실체는 물론이요, 그의 미학적 실체까지도. 자, 이제는 이미지 속 그의 실체로 다가가 볼게요. 저는 종종 ‘샤먼/리얼리즘’을 이야기해 왔어요. 제가 제시하는 샤먼미학의 핵심 체계는 앞에서 잠깐 언급했던 ‘우물론’이죠. 서구이론은 ‘거울론’이에요. 거기에 대응하는 동아시아 이론으로서 ‘우물론’을 말하는 건데요. 예컨대 거울론의 바탕은 나르시시즘에서 비롯돼요. 그리스 신화에서 미소년 나르키소스는 호수에 비친 자기 얼굴에 반해서 결국 미쳐 죽게 되죠. 그걸 철학자 김상봉 선생께서는 ‘홀로 주체성’이라고 정리하더군요. 서구의 개인주의 문화는 바로 이 자기애적 리비도에서 비롯된 것이라 본 것이에요. 반면, 동아시아의 그것은 ‘서로 주체성’이라고 말해요. 이타적 사랑이죠.

나르키소스의 자기 ‘얼굴보기’는 자기 스스로 거울에 투영된 얼굴에 빠진 것을 말해요. 나와 거울 속 ‘나’는 둘이 아녜요. 서로 맞대면하고 있는 동일자예요. 그것의 정신분석학적 개념이 나르시시즘이고요. 바로 이 나르시시즘에서 미학적 개념의 ‘재현’과 ‘일루젼’이 탄생했잖아요. 나르시시즘은 서구철학사의 척추와 같아요. 그런데 서구와 달리 우리는 모델링의 재현 문제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어요. 조선시대 초상화만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죠. 물론 그때의 초상화는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졌고 게다가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틀리면 그 사람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엄격했어요. 극진하게 재현하라고 했으니 어찌 보면 서구보다 더하면 더했지 모자라지는 않았을 거예요. 자, 그러면 무엇이 달랐을 까요? 재현은 하되 그것이 담고 있는 철학적 내용이 달랐죠. 거울에 비친 얼굴처럼 1차적 투영의 존재상이 서구의 방식이라면, 우리는 거울에 비친 얼굴 너머의 실체를 보아야 참 존재인 ‘나’가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여기 우물이 하나 있어요. 우물면이라는 거울에 비친 얼굴이 있겠죠. 이것은 서구와 다르지 않아요. 재현과 일루젼이 동시에 현현되는 면이니까요. 그런데 조선시대 화가들은 초벌을 그린 다음 자신이 만났던 사람들을 불러서 닮았는지 안 닮았는지를 물어요. 이 사람은 닮았다고 그러고 저 사람은 안 닮았다고 그래요. 사람들은 기억하는 방식이 다 달라서 자신이 기억한 인상이 아니면 닮았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럼 화가는 다시 그리죠. 그렇게 모든 사람들이 ‘아, 이제야 그 사람 같네요’라고 하면 완성본을 만드는 거예요. 심연(深淵)이라는 말은 바로 여기서 나온 말예요. 우물 속이죠. 화가가 사람들을 만나러 다닌 이유는 심연이라는 바로 그 물밑에서 표상되어 올라 와 맺힌 상을 찾는 과정이었던 거예요. 수많은 세월이 쌓여서 만든 ‘지금’이라는 얼굴.

그건 다시 말해 재현과 심연이 만나서 하나의 실체가 되는 것을 말해요. 밖의 우물면과 심연에서 표상된 우물면이 ‘하나’를 이룬 곳에 참 존재인 내가 있는 거예요. 우리 초상화는 바로 그것의 결과고요. 정리하면 나르시시즘의 미학은 단지 우물면(거울)이라는 거고 우리는 심연이 하나 더 있다는 거. 물밑의 심연이 정신의 표상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 우물론이 이해가 되죠?

 

이주연의 페이퍼맨은 현실을 건너는 이상주의자들의 초상이란 생각이 들어요. 그들은 현실을 사는 바로 우리들의 표상 주체이니까요. 그렇지만 또 그렇게 단정해 버리면 그들이 설 곳은 그렇게 많지 않아요. 그래서 우물이 필요한 거죠. 거기에는 어제와 다른 ‘나’가 나를 보고 있으니까요.

                                                                  김종길 | 미술평론가

 

 

NetworkⅠ_45x60cm_Linocut_2014

 

 
 

■ 艾柅 이주연 | ANNIE LEEJOOYOUN | 李柱燕

 

1994년 추계예술대학교 판화과 졸업 | 2004년 성신여자대학교 대학원 판화과 졸업

 

개인전 | 2015 ‘Paper Man’ (아트로스페이스, 서울) | 2014 “젖지 않는다” (Le Matou del’Arte , FIGEAC 프랑스) | ‘人間人’ (갤러리 뚱, 서울) | 2013 종이로부터 (갤러리 보고재, 서울) | TIME TO GO (Le Matou dell’Arte , FIGEAC 프랑스) | ‘Paper Man’ (ORLANDO 갤러리, 센존 레스피너스 프랑스) | 2009 ‘Paper Man’ (LEE 갤러리, 파리 프랑스) | 2008 Escape (디아스포라갤러리, 마이애미 미국) | 2006 Play the Game (갤러리 도스, 서울) | 2005 송은 문화재단 초대전 (송은 갤러리, 서울) | EBS 작가공모전 수상작 초대전 (EBS space, 서울) | BELT 2005 선정작가전 (갤러리 S.P, 서울) | 2004 ‘Paper Man’ (가나아트 스페이스, 서울)

 

단체전 | 2015 몰타 엠디나 대성당 아트 비엔날레외 40회 참가

 

E-mail | paperman70@gmail.com

 

 
 

vol.20160415-艾柅 이주연 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