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지 展

 

착란의 그림자_50p_Mixed Media_2015

 

 

 

2016. 5. 21(토) ▶ 2016. 5. 29(일)

서울시 서초구 효령로 72길 60 | T.02-2105-8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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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_8F_Mixed Media_2015

 

 

새꽃 · 날개 · 자유, 김수지의 그림

 

흐름, 화폭 위 선(線)들이 종횡무진 난무하며 흐른다. 선과 선이 교차하는 곳에 면(面)들을 만들며, 그러나 그 면들은 결코 입방체를 만들어내지는 않은 채 더 아득한 공간들과 뜨개질되어 겨우 형상을 드러낸, 즉 비형상으로서 화폭 위에 떠올라있다.

17회째의 개인전을 통해 내보인 김수지의 근작들의 특징은 이처럼 입방체가 아니라는 것, 그래서겠지만 그것은(언제라도 다른 무엇으로 이행할 준비가 되어있는) 구름이나 안개같은 비형상으로 화폭 위에 임시 거처를 마련한 듯이 현현(顯現)해 있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으리라. 현현, 그것은 일시적으로 마음에 비추어 형성된 대상의 어떤 모습이거나 하나님이 자신을 명확히 드러내는 그 강림과 임재함을 가리키는 말로 우리는 알고 있다. 이는 김수지 그가 무엇인가를 그려낸 것이 아니라 ‘그려진 무엇’을 제시하고 있을 뿐인 듯한 그림의 흔적들을 우리가 목격하는 데서 다시금 확증되는 듯하다.

불꽃 화염처럼 흰 색의 한삼 자락이 너울대는 탈춤의 춤사위에 뜨개질된 배경, 그 휘모리 장단의 리듬은 분명 들려오는 소리에 사로잡힘, 고대적 제의의 전율과 황홀경이라는 자연의 어떤 리듬을 탄다(<탈춤>, 2015). <착란의 그림자>(2015)와 <가식(假飾)>(2015)의 편집증에 가까운 엄밀한 진지함을 보라. 마치 천 개의 얼굴을 천 개의 도형으로 대응시킨 주술과 밀의(密儀)의 신비, 그 성스러운 진지함으로 완전히 몰두해있던 결과라는 해석 말고 다른 더 설득력 있는 해석을 우리는 구할 수가 없을 정도다. 식물의 잎맥이나 세포의 내밀한 구조, 극미(極微) 세계의 확대도(圖)인 듯, 그것은 일상인의 육안으로 만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마치 신의 피조물의 신비가 이처럼 영롱하다는 듯, 우주적 연기(緣起) 속에 있는 중생, 모든 있음(有)들의 최초의 설화같기만 하다.

 

 

조선 여인을 위하여_8F_Mixed Media_2015

 

 

그림의 본령이 감각과 지각의 세계, 색채와 형상과 그 어우러진 공간들을 떠나 달리 있을 수 없지만, 이들 지각과 의식을 넘어가는 것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것도 여전히 진실이다. 김수지의 ‘입방체가 되지 못한 비형상’의 유동성, 있음(有)을 있게 할 그저 기(氣)의 흐름만의 것인 듯한 피동적 형상성을 주목하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유위(有爲)가 아니라 무위(無爲). 그는 나의 뜻을 내세우며 내가 원하는 대로 뭔가를 이루려는 인위보다는 낮이 가면 밤이 오듯이 봄이 지나 여름 오듯이 자연이 하는 일, 무위가 하는 일에 더 내맡겨 살아가고자했던 사람이었다는 사실. 필자가 전해들은 바, 그 신산했던 라이프 스토리가 그렇고, 여백(餘白)이라는 사물의 저편에 대해 주목하는 한국화라는 그의 화업의 시작으로서의 필연적 성향이 그러하다. 또한 2010년경부터 <내 마음의 정원> 혹은 <내 마음의 자연>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하기 시작했던 꽃의 어떤 신경증의 표현까지도 무심히 지나칠 수 없게 할지도 모르겠다. 예컨대 그는 운명의 계시와도 같은, 생성과 소멸이라는 자연의 리듬에 어떤 식으로든 ‘사로잡히기’ 시작했고 그것이 사람의 삶에 일정한 방향을 부여하는 것이라는 모종의 깨달음이 확장되어간 역사였다고 말하겠다. 따라서 그 그림은 그가 그려낸 것이라기보다는 누군가 혹은 어떤 자연이 그려준 것, 그 그려진 그림을 따라 임모(臨摹)하듯 ‘그려졌다’고 말해야겠다.

김수지의 난해한 조형의 향연들을 모든 ‘스스로 그러한’ 사물들에 대한 찬양, 인간의 알량한 의지나 욕망의 성취들을 제 자리로 돌리는 겸양, 모든 삶의 어둠과 고통들에 대한 지극한 애린(愛隣)으로 읽을 수 있게 하는 이유다. 그러나 이는 반쪽만의 진실이다. 그의 그림이 단순히 대기(大氣)의 지도, 기(氣)의 등고선 표식으로서의 수동적 기록지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의 폭발적인 발산이라는 자율적인 표현을 분명하게 드러내놓고 있기 때문이다.

한글창제라는 애민사상의 위대한 발명품마저도 대부분의 조선의 여인들에게 그 은총은 빗겨나 있던 덧없던 시절에 대한 연민에서 발상되었다는 비교적 작은 그림 <조선 여인을 위하여>(2015)나 기도와 천사의 다짐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투사하고 있는 <기도>, <섬김>과 같은 작품은 그 직접적인 예화이다. 또한 <성장(盛裝)>, <디오니소스(축제)>, <공작>과 같은 작품들의 경우, 몸부림치는 어떤 우주적 감동이나 세계 질서에 대한 인식에 시적 표현을 주고자하는 그 자신의 격동의 파토스는 보다 여실하다. 격정의 파토스라 함은 그야말로 생이 먼지와 죽음과 비탄의 그림자와 균점하고 있는 상태, 곧 최고의 생과 최고의 죽음이라는 나란한 무(無)이자 나란한 유(有)다. 그것은 목적이 없으나 의미 있는 것, 즉 ‘놀이’이기 때문이다. 신만이 누릴 수 있다는 진지함의 세계에 참여하는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최선의 방도, 삶을 놀이하면서 살아야한다고 플라톤이 말했을 때의 그 놀이인 것이다. 어린아이들의 놀이로부터 운동 선수의 경기에의 몰입, 무대 위의 연기자, 악기 연주자, 예배나 제의의 참여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놀이의 참여자들이 그 성스러운 진지함으로 다른 세계로 훌쩍 옮겨가듯이 그의 그림은 목적 없는 의미의 세계, 문화를 훌쩍 벗어난 곳에 거처를 정하는 다른 세계의 그림인 것이다.

 

 

겸손_20F_Mixed Media_2015

 

 

잔디밭, 정구장, 장기판, 돌차기 놀이를 위해 그어놓은 땅위의 선, 그 격리된 공간은 이제 그의 화폭이다. 그 은둔의 공간에서 그는 심신을 다 바쳐 놀이에 흠뻑 빠져든다. 그리곤, 단지 ‘놀이’라는 생각마저 뒤켠으로 물리친 채 놀이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즐거움은 긴장으로, 정신의 고양으로, 자유분방함으로, 무아경으로 격동하는 것이다.

그 화폭에 그는 무엇을 그리는가? 자폐에 가까울 정도로 고독했던 그리하여 그림만이 유일한 ‘말’일 수밖에 없었던 연민어린 유년기다. 혹은 귀신의 악의에 찬 위협에 노출되어있는 긍휼한 인간의 연약함이다. 천지간에 어짊(仁)이란 원래도 없는 것이라는 헐벗은 운명의 야멸참과 쓸쓸함이다. 비로소 해가 지자 화폭으로부터 물러서 이제 그만 놀이의 정신이 무너져 환상으로부터 깨어나 냉정한 일상으로 돌아오기까지 그가 하는 일이다.

그는 이를 철저히 가상(假象, Schein)으로 그려냈다. 아름다움이나 위로도 더 이상 없으며 오직 공포를 직시하고 감내하는 일만이 남아있다는 듯이…. 이 대목에서, 세상의 넘쳐나는 가상(假想, Illusion)들에 맞서 또 하나의 가상을 그려낼 수밖에 없다는 예술이 안고 가야만 하는 숙명적 난관을 어떤 식으로든 예견하는 그의 행보에 대해 필자는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언필칭, 우리들이 너무도 쉽사리 동의하곤 하는 영원히 살아남겠다는 불멸성에 대한 욕망, 혹은 보다 나은 상태로 나아가려는 진보에 대한 동경에 뭐가 잘못된 것이 있느냐는 식의 볼멘소리-상식과의 대결을 말함이다. 진보 혹은 불멸성엔 죄가 없다? 그러나 철학사의 진지한 사유자들이 경고하듯이 그것은 동일성의 가상이요 거짓된 가상(Illusion)이다. 예술의 최종의 덕목이란 이를 좌절시키고 진정한 타자의 가상을 구제하려는 것인 점에서 말이다.

김수지의 이번 전시작, 비형상의 목적 없는 그림들이 그 의미 있는 행로에 들어선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이 말은 또한 동시에 그 그림들이 문화를 벗어난 그야말로 유치한 어린아이의 놀이처럼 진지함에 훨씬 못 미치는 놀이가 될 수도 있고 또한 단순한 진지함을 넘어 아름답고 성스러운 경지에 들어갈 수도 있는 징표가 되기도 하다는 점에서 위기와 기회의 바늘 끝에 서 있는 상황과 동음이의어이다.

앞으로 가야한다는 것! 진정한 진보는 무릇 모든 이데올로기를 퇴행으로 쳐내면서 유토피아로 나아가는 것이다. 애잔한 형상의 인물상이라는 가상을 통해 ‘응답’을 만나듯, 헛되고 헛된 미몽(迷夢)을 통해 ‘행복에의 예감’을 만나듯, 사유를 통해 ‘책임’을 만나는 것이다.

박응주 (미술비평가)

 

 

가식(假飾)_50P_Mixed Media_2015

 

 

아 픈 것 들 이 가 끔 보 인 다

새벽녘 안개가 뒤엉킨 시간 속에 서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으리라. 영혼의 냄새들이 안개 속에서 타 오른다는 것을. 그림을 그릴 때마다 나는 다 말 할 수 없는 세상의 노래 첫 소절이거나 여운을 남기는 풍경처럼 아득해질 때가 있다. 오랫동안 그림을 그리면서 나 자신이 안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색에 밀리지 않기 위해 부담하게 노력했던 한 시절에서 지금은 색을 거둬내는 그 절박함까지 그림을 통해 이야기 하고 싶었다. 마치 이 일은 나의 전 생애를 걸고 올라가야만 하는 시시포스의 슬픈 운명처럼 그리고 또 그린다. 이 길만이 상처를 극복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나는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무엇보다 이번 작품에서는 빛깔을 최대한 버리는 작업을 여러 차례 시도했다. 또한 삶의 생채기들을 나 스스로 껴안아주려고 많은 시도들을 해보았다. 그린다는 행위는 그림과 논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리워하면서 그림을 그리고, 마음을 열어 오로지 오감을 받아들여 기필코 내가 먼저 지치지는 말아야지 하면서 그린 이야기들이다. 나와 다른 너와, 나이기도 한 너를 우리라고 기어이 명명 할 수 있다면 그림 그리기는 나의 쓸쓸함과 슬픔과 아름다움에 몸을 바싹 붙이는 일이다. 여전히 하루해가 지나도록 봄은 흩어진다, 바람이, 햇살이, 시간이, 꽃이, 냄새들이 가장 슬프도록 나의 감각 속에 스며든다. 내 속에 무언가 그리는 자로 기꺼이 남고자 하는 내 모든 절망의 씨앗들과 꽃들과 뿌리에게 입 맞춘다. 내게는 울어줄 손이 그림을 그리는 이 손이니 부디…….

2016년 5월 김수지

 

 

공작(peacock)_20F_Mixed Media_2016

 

 

 
 

김수지 | Kim Soo Ji

 

예원예술대학교 졸업

 

활동 | 한강미술대전 심사위원 역임 | 서울미술전람회 심사위원 역임 | 수정문화사회교육원 강사 역임 | 現 송파미협 총무 | 現 한국미술협회 회원 | 現 송파미술협회 회원 | 現 송파여성문화회관 출강

 

개인전 | 1999 제01회 개인전 (일본그린아트 갤러리) | 2002 제02회 개인전 (덕원갤러리) | 2003 제03회 개인전 (일본히로다갤러리) | 2006 제08회 개인전 (일본천대당갤러리) | 2006 제09회 개인전 (일본노아갤러리) | 2008 제10회 개인전 (KBS시청자갤러리) | 2009 제11회 개인전 (일본예술촌아트공방갤러리) | 2009 제12회 개인전 (나음갤러리) | 2010 제13회 개인전 (서울미술관) | 2010 제14회 개인전 (서울미술관 기획초대전) | 2010 제15회 개인전 (서울미술관) | 2010 제16회 개인전 (갤러리 샘) | 2011 제17회 개인전 (서울미술관) | 2016 제18회 개인전 (한전아트센터갤러리)

 

수상경력 | 대한민국미술대전 입선 2회 (국립현대미술관) | 대한민국문화미술대전 대상 (노원 미술관) | 대한민국여성미술대전 은상 (예술의전당) | 대한민국환경미술대전 우수상 (단원미술관) | 대한민국여성미술대전 우수상 (국제디자인프라자)

 

소장처 | (사)대한무학무술 | (주)OMI | 한국산업은행 | 중국진화국제학교

 

Email | rtsooji@hanmail.net

 

 
 

vol.20160521-김수지 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