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5_20080823_조각난 일상_진,선,미

조회 수 3049 추천 수 0 2010.08.12 01:00:59

emmagazine vol.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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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 | 조각난 일상

글 | 김용민

제품의 기능성이 상실되는 때, 제품의 맹아(盲兒)가 태어났다. 그 자리는 비었고 인간의 몹쓸 간섭이 그쳤다. 그들의 본적은 공장이었지만 지금의 거주지는 사물이었다. 이제 사물로 취하게 된 공간은 도구화 되지 않고 사사로운 필요성에 단절을 고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가공된 사물이라는 점이 찔려 기능성을 의식하게 하는 옷을 벗지 못하였다. 이것이 원래의 사물과 구별되는 것이었고 기능의 상실에 작가의 개입으로 진정성이 부여되는 시점이었다. 모든 것은 그 고유한 제품의 의도에서 어긋나게 되었고 무엇 무엇을 할 수가 없는 상황에 무엇인가 비틀어진 일상의 시기를 거치고 있었다. 제품이 스스로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게 될 때 그들의 몸에서는 뼈가 돋아나기 시작하였다. 이 뼈는 성장이자 거부며 저항의 상징이었다. 그 뼈는 살로부터 뻗어 나온 게 아니라 철칼의 난도질로 뻗혀 나온 몸체들이었다. 분명 외부 누군가의 개입이 아니었다면 모든 골조를 들어내며 한 뼘의 공간도 허용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는 작가와 사물과의 위험한 놀이라. 그 처음, 기능의 상실을 맛보고 난 후 그 둘의 장난은 난폭하면서도 매혹적인 이끌림으로 자극하고 있다. 제품은 자신의 눈을 뜨기 위하여 작가의 손을 빌렸고 작가는 공간의 미적의미를 부여하기 위하여 제품의 구조를 해석하기 시작하였다. 어떻게 보면, 비틀린 사물의 골격이 공간 기능의 상실을 연쇄하게 하여 공간이라는 것 역시 사물의 원형이 상실됨에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접근하기 힘든 그 곳, 장소의 놓침이 알량하게 성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누가 이러한 상황을 수습한다 하였지만 케이블타이로 재봉된 온 몸은 상처뿐이었다. 그렇지 않은가. 누군가의 위험한 시선이 변화의 조짐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조짐은 기계의 진화였다. 어떤 측면에서, 진화는 돌연변이의 역사다. 환경과 조건의 마찰로 발생된 수많은 서사의 이야기들이 사물의 상실된 자리에서 가시화 되고 있었다. 스스로의 내용을 시각화 하는 모습이 우리의 눈총을 의식한 채 어떠한 구조와 조합이 우리의 눈과 입을 흥분시키게 하고 있었다. 약간의 여유가 생긴 것인지 대상은 인간 최대의 발명이라 할 수 있는 플라스틱과 철의 구조를 재조합해 가기 시작하였고 ‘불편한 유쾌함’으로 우리의 인식으로부터 낯설게 되었다. 그 후, 우리의 역할은 멜랑콜리(躁鬱病)하게 되어 나긋해진 그 장소의 발칙함에 약간 아찔하게 되었다. 이제부터 상실된 기능은 다른 기능으로 전이되었고 뒤틀린 사물의 메커니즘이 그 장소를 어색하게 다른 한편으로, 불쾌하게 하였다. 이렇게 거기는 버젓하게 조각난 일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미술공간은 사적이지도 공적이지도 않고, 상실되고 틀어진 일상의 공간이지 않은지. 거기서 그 무슨 섭생의 유익을 찾을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 미술공간의 필연성은 일상에 대한 곡해와 메커니즘의 전이로 저들의 장소를 꾸리게 되었다. 그 근원이 사물의 욕망에 있었다. 엄밀하게, 이 욕망은 스스로 진화되어 인간사의 부조리와 모순된 구조를 꼬집는 것에 있었다. 더 근원적으로, 그것은 미술공간으로 소급되었다. 그 문을 들어섰을 때 모든 바깥 것은 공간에 포섭되었고 입이 봉해지게 되었다. 기계가 진화한 모습을 목격하고 처절하게 무기력해진 관객의 위치에서 ‘조각난 일상의 전시됨’의 이유가 밝히 드러났다. 그것은 일상과 구별되어 미술공간만이 갖는 고유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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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선, 미

글 | 김용민

진리는 비어 있음이다. 이 비어 있음이 호기심과 유혹이 발생하게 한다. 호기심은 선과 악을 넘어선다. 궁금하고 보고 싶고 알고 싶은 욕구, 이것은 좋은 것이다. 이 욕구가 진리의 존재를 증명한다. 그러나 유혹은 호기심과 다르다. 언뜻, 유혹은 호기심과 비슷한 모습을 취하고 있으나 그 실상은 진리를 가리우는 역할을 한다. 비어 있음 그 자체에 회의와 허탈감만 줄 뿐이다. 자살은 여기서 나온다. 다시 한 번 진리가 비어 있음인 것은 진리 그 자체가 진리인지라 비어 있음이란 우리를 만들었다. 우리는 진리의 빈자리며, 그렇기에 진리를 쫓을 수 있다. 어느 덧 진리는 세속의 되어 빈자리에 임하게 되었으니 우리가 하는 모든 언행에 맞추게 되었다. 말을 하면 그렇게 될 것이며 행하면 그렇게 될 것이다. 진리는 우리의 의지에 녹아 피어난다. 이런 우리의 삶은 아름답다. 이러한 삶은 계몽 이전의 삶이며 분리 이전의 통합된 상태다. 아퀴나스는 조화를 말한 바 있다. 조화보다 더 이전이며 중요한 그때부터 하나였던 것, 이것을 아름답다 한다. 비어 있음을 아름다움에 적용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아름다운 소리는 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귀로 들리는 것이다. 노래의 끝은 들음이다. 듣는 귀는 비어 있고 공간이 있다. 시간을 타고 계속해서 지나치는 음들이 귀 속의 비어 있음에서 멈추고 하나의 모습으로 통합된다. 그것이 아름답다고 한다. 그림은 그리는 것을 넘어 그리지 않는 것이 고결하다. 그리지 않음으로 아름다움이 자유롭다. 빈자리에 무엇을 그릴 것인가 보다 빈자리에 무엇을 버릴 것인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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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창하 展

갤러리 선 컨템포러리

2008. 9. 25(목) ▶ 2008. 10. 17(금)

서울시 종로구 소격동 66번지 | 02- 720-5789 , 5728

www.suncontempora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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