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magazine vol.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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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가지 질문과 발견

 

미술작품이 문학작품을 낳고 책으로 작품을 접하는 독자층이 형성된다면, 이것이 미술비평의 영향력이 아닐까. 사실 작품을 이해하려고 하는 관객은 많지 않다. 작품을 느끼고 적극적으로 감상하는 관객은 뭐라 언어화할 수 없는 부분을 체험하길 바라고 있다. 그것을 텍스트라는 도구로 치환하여 같지만 다르고 다르지만 같은 체험의 내용을, 글을 읽는 이에게 전도 傳導 할 수 있다고 하자. 참 재미있는 발상이 아닌가.

명쾌한 것은 중요하지 않다. 미술의 역사는 질문과 발견의 연속이다. 예술의 경계가 애매모호해진 지금, 필요한 것은 오히려 노동에서 비롯되는 진정성이 아닐까.

진정 예술가들이 원하는 비평은 글 속에서 공포를 발견한 비평 글이다. 작가도 알지 못했던, 그렇지만 작가가 그 내용을 도저히 부인할 수 없이 이해하게 되는 글, 그것은 비판 없는 비평의 힘이 아닌가.

순수하게 미술로 예술가를 알게 되고 개별성 있는 기획자로 성장할 수 있다면, 나는 미술의 움직임이 자본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닌 표정을 가진 사람에서 감동하는 사람으로 옮겨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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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인희 | 그가 보기에 좋았다.

 

옷걸이에 걸린 옷을 보았다. 누군가의 자취가 느껴진다. 그 사람의 살스러움이 깃털처럼 가볍게 작은 모래알 위로 사각거린다. 그이가 여기에 있진 않지만 누구든 그를 떠올릴 수 있다. 아마도 그림자 없는 옷이 무겁지 않아서일 꺼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없어도 옷은 모습을 갖는다지. 익명이 되어 고유한 성격을 간직한다고 한다. 잠시 슬픔이 맺힐 수도 있고 잠깐 기억을 회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옷이 비쳐져 옷의 반대편이 겹쳐 보이게 되면 기억의 장면이 한 공간에 마주하여 거참, 복잡한 것을 싫어하는 모양이다. 여기 캔버스 위에는 말끔하다 못해 사적인 찌꺼기가 빠진 옷의 그림자가 있다. 그 옷의 뒷면은 그 앞면의 그림자요, 동시에 같은 입장이 되고자 한다. 사실 입장이라는 것은 맞닥뜨린 상황이 아닌가. 사람의 몸이 없는 옷이 갖고 있는 상황은 이제 벗겨져 있지 않고 벗어있다. 누구의 것도 아니고 특별하지도 않다. 단지 대표될 뿐이다. 아담과 하와는 벗은 최초의 사람이고 인간을 대표한다. 옷이 벗어있다면 그 옷은 최초의 옷이며 옷을 대표한다.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옷을 입는다 하지 않고 옷이 공중에 서있다고 한다. 시간도 공간도 알 수 없는 공중에 옷은 서있다. 그 이미지가 아무리 가로로 길다 하더라도 그 이미지는 가로로 서있다고 한다. 서있는 곳에는 가장 특징적인 정면의 모습이 드러나게 마련. 정면성이 서있다고 한다. 그 정면성은 단순히 앞면만을 의식하지 않고 앞면의 앞면이 되는 뒷면의 정면성과 함께 한다. 그렇기에 서정적 내러티브가 안개를 뿌린다. 이 안개는 투명하고 환하여 잠시 동안만 색연필의 부서짐에 흔들거리다 습자지처럼 비치는 옷감으로 말미암아 안과 밖도 앞과 뒤도 한 번에 보이게 되었다. 옷의 심장이 보인다. 모든 방향이 중첩되어 검게 그을린 자리다. 그 자리에서 서정적 내러티브는 개연성과 필연성을 갖는다. 한 번 흔들리고 한 번 맺히는 곳, 여기가 개연성이고 필연성이다. 그렇다고 극적이지는 않다. 홀로 서있는 자신에게 독백에 가깝다. 그는 말을 걸지도 않았고 말을 하지도 않았다. 그는 있었다. 그리고 독백으로 남았다. 그 독백은 옷이라 불렀던 테두리에 남아 과거를 회상하게 한다. 그대는 시를 좋아한다. 소리 내서 읊기도 하고 속으로 삭히기도 하는 소담하고 고소한 가루를 가지고 놀기를 좋아한다. 우리는 어릴 적 옷을 갖고 놀기를 좋아했다. 그때의 옷은 입는 게 아니라 내 안의 이야기였다. 내 안의 시. 시는 읽는 것이 아니요, 이미지로부터 외쳐진 소리다. 그 소리는 종이의 테두리가 뜯겨진 모양과 같다. 종이가 찢어져도 자연스러운 것처럼 여운을 남기고 촉감이 스쳐 지나간다. 이처럼 그의 개연성과 필연성은 이와 같았고 주어의 불분명함이 다가온다. 그것을 한 때는 익명이라 하였고 또 한 때는 대표라 하였다. 누구도 아니고 누구도 아니다. 다만 이미지가 시의 문맥에 서있기를 바라며 그 자체로 보이길 원한다. 그렇게 옷의 정면성은 모호함 중에 스스로 명확하기를 원한다. 자신의 색을 버리면서도 아릿하게 스쳐간 시간의 점을 잡길 원한다. 흔들리고 떨리며 겹쳐진 이미지는 그러한 방식으로 자신의 분명함을 설명하고 있다. 이해하지 말고 미처 흔들린 옷의 이미지 사이를 보는 것이다. 그 간격은 낯설지 않게 빗겨간다. 누구나 가슴으로 있을 수 있고 잠시 기억할 수 있다. 이는 물자체(무게)도 아니었고 이념도 아닌 것이다. 단지 작은 생각이 그림자를 만들며 보기에 좋게 여기는 것이다. 할 수 있다면 더욱 무게를 던져 옷의 그림자에 깃털을 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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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창 | 생명의 샘·자연으로부터

 

화실에 들어서면 황토색으로 어우러진 그림들이 보인다. 그리고 해질녘이면 가끔씩 성장기의 추억이 서린 고향. 송곡(松谷) 마을이 떠오른다. 밀밭사이로 넘실대던 백마강의 은빛 물결. 석양빛에 붉게 물든 부소산성의 저녁노을. 언제나 푸르던 솔밭과 그 사이로 붉게 물들여진 황토 흙 내음. 나는 그런 흙과 함께 유년기를 보냈다. 뒷동산에 오르면 이름 모를 풀벌레 소리와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영롱한 별빛. 순간, 남쪽 끝으로 사라져 가는 별똥을 보며 대자연에 대한 경이로움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으로 소년기를 보냈다. 숱한 밤을 지새우던 젊은 날의 사랑과 고독. 자유를 갈망하며 방황하던 불혹의 세월. 절망의 늪에서도 한줄기 푸른 희망으로 다가오는 그곳에 대한 그리움. 내 작업의 시작은 그곳에 대한 기억에서부터 출발이리라. 내 그림에는 단순화된 인간형상과 자연형상들이 나타나는데 그들은 흐트러지고 해체되고 때론 정돈되어 그들 모두는 하나의 세계로 이어진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인 것. 자연 속의 모든 것은 인간만큼 소중 하다. 그것이 최소한의 자연의 법칙이리라!자연은 모든 생명을 낳고 어머니 품처럼 우리를 감싸 안는다. 광교산 숲길을 가며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면 영혼을 울리는 생명의 소리를 듣는다. 생명의 샘 - 자연은 결국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고향이다. 오늘도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표현 방법을 통하여 자연과 나의 세계와의 인연을 맺어 대자연의 울림을 표현하려 부단히 노력한다. 또 하나의 가을이 세월의 덧없음을 손짓하며 집착을 버리라고, 마음의 창을 두드린다. 이 밤도 번뇌의 산을 넘어 진정한 자유인을 꿈꾼다. (버들치 화실에서   김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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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미 | 포착된 일상의 풍경

 

겹을 쌓고 있는 손은 지금까지 실의 특성에 갇혀 재료가 주는 에너지에 익숙해졌고 어느덧 길을 텄다. 접착제의 지저분함을 조심하며 실이 가는 길을 찾아 드로잉을 하고 있다. 하나의 선이 참으로 진지하고 지루한 시간을 목도하게 만든다. 그 시작과 끝은 캔버스를 실로 덮는 일이요, 자신에게 있어서도 놓치고만 재료의 뒤편에 관한 얘기다. 엄마의 무릎에서 손으로 실타래가 감긴다. 화면의 자리이동이 일어나고 있다. 이렇게 작가의 손은 잘 정리하고 꼼꼼하게 화면의 면적을 활용하고 있다. 결국, 어떤 작업에서는 캔버스를 다 덥히고 말테지만 화면에 드러난 형태의 외곽선을 쫓아 다양한 방향성이 다양한 빛살이 된다. 이 글은 실을 가지고 일상을 대상으로 작업하는 이상미의 작업에 관한 내용이다.

그는 그의 손에 거쳐 간 다양한 사물들에 관심을 갖고 있다. 가장 많이 시간을 보내는 작업실의 풍경이 주로 화면에 등장한다. 거기엔 자신이 쓰던 의자, 테이블, 선풍기, 소파, 신발 등이 있다. 그 형태를 따라 실을 붙인 기억을 따라가면 큰 굴곡 없이 성실한 일상이 누적되어 있다. 시간은 실과 같고 그 실은 그늘1)을 갖고 있다. 이 그늘이 사물의 무게를 만들어 실재하도록 한다. 정확하게 보면, 이미지 속에 실재는 사물이 아니라 사물을 형성하는 가냘픈 오브제였다. 사물은 오브제와 오브제가 마주하는 지점, 기억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고 많은 면적에서 사적인 사연이 풀칠되어 있다. 여기서 관심이란 시선의 행적이 기록되기 시작하며 감정이 개입하게 된다. 감정은 지극히 가까운 곳에서 발생하는 마찰과 같다. 예술작품은 감정의 소산물이며 현실을 반영한다. 그것은 미술사적으로 리얼리티(Reality)의 흐름이었다. 서구의 리얼리티는 그늘이라는 측면을 사물성(objecthood)에 고착시킨 채 와해되었다. 더 이상 사건의 잠재성은 속빈 중국식호떡처럼 덩치만 크게 충격으로 던져졌다. 충격 이후 그곳엔 순응된 시선이 충혈 되어 있을 뿐이다. 실제로, 이미지는 허구였고 우리의 지각이 이미지에 착각되면서 서구미술은 ‘사이비 엘리트화’를 선택하였다. 사적 사물(대상)이 미적 권위를 취하는 문제라 할 것이다. 일상은 반복되고 있다. 큰 변화가 있기보다는 익숙한 길과 같다. 충격은 전혀 새롭거나 경험하지 못한 것에서 오는 체험으로 그것을 일상적이라 하지 않는다. 또한 일상은 현실이며 사실이다.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꿈과 같지 않고 텔레비전 속에 등장하는 스타들처럼 부유하거나 고상하지 않다. 일상에서 느끼는 감정은 그 어떤 것에 대한 권위를 갖지 않은 채 다만 일상이라는 리얼리티를 반영할 뿐이다. 그렇게 사물성에 고착된 그늘은 시선의 외면에서 ‘시선의 행적’으로 기록되기 시작한다. 그것은 이상미의 작업에서 진정성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는 익숙한 것에 마음을 두고 하나씩 하나씩 사물을 펼치고 있다. 그 중에도 중요하다 싶은 것에는 색실을 사용하여 구별한다. 그 어떤 것도 소외됨 없이 두루두루 관심을 쏟는다. 이제 화면은 기억을 펼쳐 한 장면이 되었다.2) 실크스크린으로 쭉 그은 모나리자와 다르다. 그는 그렇게 성의 없이 우연성을 만들어 내지 않았고 자신과 크게 상관없는 대상에 마음을 두지도 않았다. 자신의 위치를 아는 것에서 시작하여 하루 동안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 거리만큼의 작업에서 마친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리얼리티가 아닌가. 캔버스 화면에는 실의 드로잉이 있다. 그 드로잉은 이미지를 재현하기 위하여 충실히 화면에 봉사하고 있을 뿐, 시선에 대고 사기를 치지 않는다. 실 끝과 실 끝이 만나는 지점에 보풀거리는 드로잉이 나타난다. 이 드로잉은 실이 만들어 낸 드로잉과 다른 우연찮은 수확이다. 이런 방식으로 평면에서 사물은 발견되며 기억 속 모든 대상은 자신과 관계하고 관계되는 지점까지만 의미와 해석을 갖춘다. 이를 주름(겹을 쌓아 올림)이라 하였다. 이 주름은 사유물에 ‘단순한 공식의 옷’을 입혀 공론화 시킨다. 누구든 부담 없이 사적인 시선이 가능하면서 드로잉을 쫓는다. ‘포착’(prehension)이다. 실시간 기억을 되짚어 볼 수 있게 하는 좋은 매체는 사진이다. 특히, 디지털 카메라는 순간을 포착하며 다량의 이미지들을 메모리칩에 저장시킨다. 이 사진이 잘나오고 못나오고는 중요하지 않으며 무엇을 취할 것인지 말 것인지가 중요하다. 당연, 시선의 포착이다. 포착된 이미지는 평면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시선이 이미지를 포착할 때 이미지의 단면을 볼 뿐이다. 그럼에도 그 시선은 장소성을 이미지에게 바라고 있다. 포착은 순간에 가깝고 재현은 지루하다. 어찌되었든 실의 드로잉은 사물의 형태를 강요하면서 상황을 연출하게 되었다. 가방의 손잡이가 갖고 있는 곡선을 따라 실의 드로잉이 화면에 붙는다. 아무리 정교하게 실을 붙인다 하더라도 작가의 손은 자신의 지문처럼 실의 주름을 만든다. 지루했던 이미지의 재현이 순간에 포착되는 시점이 온다. 그것은 달그락 거리는 시선의 소리다. 눈으로 일상의 주름을 만진다. 그것은 감각체계의 변화다. 궁극적으로 일상이 체험되기 위해서는 현실이 되어야 하는데 캔버스 화면은 더 이상 스틸 컷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일상을 구성해 내었다. 더군다나 무게를 갖는 사물이 입체가 되어 현실공간에 화면의 일상을 재현하고 있다. 이것이 ‘진정한 각자의 몫의 해방’3)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양한 방향성’이 화면을 향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현실공간에 오브제가 등장하면서 실의 드로잉은 감는 것으로 바뀐다. 사물을 감는 것이 현실공간에서 드로잉이라면, 그것은 여러 층으로 된 각막 뒤로 빛이 새어 들어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사실 우리의 눈은 그렇게 이성적이지 못하여 비중을 두는 것에 뚜렷해지며 멀리 있어도 보다 커진다. 하물며 그것 밖에 보이지 않기도 하니, 각막의 레이어는 매우 히스테리하다. 사물을 감는 드로잉은 그 도구적 기능성을 잃게 하면서 일방적으로 화면을 향하도록 요구한다. 또한 그 오브제로 말미암아 주어진 화면의 기억과 교차되길 바라고 있다. 어쩌면 드로잉이 사물을 취한다고 할 때 사물의 도구적 경험치가 얼마나 소유된 대상화되었는지를 발견하게 한다. 일반적으로 일상이라는 개념을 팝아트와 연결시켜 설명하는 경향이 많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이 지극히 표상적이며, 일상의 진솔함을 망각한 채 소유를 추구하는 대중에 휩쓸렸는가. 의자를 감고 여행 가방을 실로 감는 행위는 그 사물을 알아가는 작업이다. 안다는 것은 손의 지문으로 대상을 느끼는 살스러운 이해다. 여기서 ‘형태’의 새로운 의미가 드러난다. 사물은 그 고유한 색을 잃어버린 형태로만 남았고 거기에 감긴 실은 사물의 지문이 되었다. 그 오브제는 평면의 풍경에서 입체로 튀어 나온 중요한 실마리로, 그것은 형태라는 것이며 그것으로 관객은 화면에 참여하게 된다.

사적이지만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사물의 형태를 통하여 우리의 시선은 다시 화면으로 돌아가게 된다. 비로소 흥미 있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그것은 평면에서의 사물 이미지와 공간에 놓인 사물 오브제에서 오는 유비였다. 이 둘은 동일한 형태를 갖고 어느 하나의 방향으로 포착되어 있다. 전시공간에 있는 의자나 여행용 가방은 평면에서 포착되어 나왔으며 화면이 암시하는 사적 내러티브를 읽을 수 있게 한다. 실제로 의자에 앉지 않아도 시선은 의자에 앉아 테라스에서 커피를 마시며 도로의 풍경을 의식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아울러 그 시선은 전시공간에 위치한 사물이 화면을 향하여 그(사물)의 정면성을 조아리고 있는 방향성으로 강요받기 시작한다. 모든 것이 ‘단면’4)에 대한 고민으로 불거져 나온 것이다. 기억이라는 것 역시 시간의 단면이다. 작가는 실을 풀며 그 주름을 재며 그 거리만큼 기억을 더듬는다. 그의 풍경은 평면이며 단면이다. 단지 실재성을 갖고 있는 단면이기에 사물을 거리와 면적으로 파악한다. 평면이 공간을 활용하고 있으나 벽을 타고 불쑥 튀어 나온 정도에서 그친다. 즉, 일상의 포착이다. 그만큼만 공간을 활용하고 그만큼만 화면으로 향한다. 이에 대한 작가의 작업은 순간적이거나 감각적이지 않다. 이미 지나간 것이니 더 이상 급할 필요는 없다. 여기에 주름을 만들고 있는 그의 손이 보인다.

 

1) 여기서 그늘은 대상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표현하지 않는 지점을 말한다. 예를 들어 실을 캔버스에 붙이는 행위는 수고스러움이 수반된다. 즉, 표현의 이면 혹은 재현의 이면이다.

2)  질 들뢰즈(Gilles Deleuze), 주름, 문학과 지성사, 2007, 서울, p. 71 “때로는 물질의 겹주름 안에서 색을 진동시키고, 때로는 비물질적인 표면의 주름 안에서 빛을 진동시킨다.”라는 문장을 적용시켜보면, 사물은 색의 충만한 물자체며 동시에 스스로 사물 됨의 의미와 내용을 내포하면서 끊임없이 재현되고 있다. 풍경 속 사물을 표현하기 위하여 촘촘하게 실을 누적시켜가는 것은 사물을 현시하게 하는 방식으로 보이며 하나의 기억이 과거로 잊히지 않고 실체의 장면으로 이어질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한다. 특히, 빛에 의해 발생하는 실의 그늘짐은 화면을 매우 얇고 균질하게 매우고 있어서 일상에 관한 표현으로 읽힌다.  

3) 위의 책, 2007, p. 146 여기서 ‘사적 주관성의 진정한 각자의 몫의 해방’이란 표현을 인용하였다. 이 문장이 의미는 바는 세계는 새로움의 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움과 창조성의 능력을 가진 세계다. 이상미의 작업에 적용하여 봤을 때, 주관적이고 사적인 사물과 풍경이 캔버스 화면에 실을 붙이는 방식으로 재현되면서 다시 현실 공간에 캔버스에 등장하는 이미지가 오브제로 등장하는 것은 평면성을 현실화시킴으로, 평면성을 갖는 화면에 현실공간이 집중하게 하는 현상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방식은 미술사적으로 많이 거론되었으나 그의 작업에서 특이점은 그 오브제가 화면을 향하고 있다는 방향성에 있다.  

4)  ‘단면’은 평면회화가 추구했던 평면성과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단면은 칼로 어떤 사물을 잘랐을 때 보이는 면으로 사물이나 사건의 여러 현상 중 한 부분으로 파악된다. 이상미의 작업은 앞으로의 작업이라기보다는 지나간 것에 대한 작업이다. 지나간 것은 동시에 볼 수 없으며 언제나 그 한 부분 곧 단면으로만 파악된다. 그 단면을 보여주기 위한 반복적인 실 드로잉 작업은 그 순간순간 하나하나에 정성을 쏟아 각별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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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득영 개인展

 

- 테헤란 -

 

한국 디자인문화재단 갤러리 D+

2009. 8.10(월) ▶ 2009. 9. 4(금) 

서울시 종로구 신문로 2가 1-160 | 02-735-9611 

후원 :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 문화예술위원회, 한국디자인문화재단, 엡손, 케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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