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18_20091127_작가 김 수-세 개의 서랍

조회 수 2918 추천 수 0 2010.08.12 01:07:48

 emmagazine vol.18

작가_김 수 | 세 개의 서랍 | 글_김용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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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어느 날에 대한 회상을 시작한다. 기록의 역사가 출발하는 때, 어디선가 비극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진다. 안티고네(Antigone)의 저자 소포클레스(Sophocles)가 비극의 각본을 마무리 짓기 위하여 에테르의 강을 건너며 작곡한 시다. 스스로의 눈을 찌른 오이디푸스의 비극이 안티고네로 흘러 소포클레스의 기억을 상실시킨다. 존재는 기억으로부터 나온다. 어쩔 수 없이 비극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강을 지나 기억의 방에 들어가면, 과거의 옷을 벗어 던진 투명한 알몸의 인간이 된다. 무엇 때문인지 사람은 상실된 곳에서 자유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것은 누가 명령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나의 아버지로부터 유전되었고 기억을 앞서는 피의 서약이었다. 수많은 이가 존재를 잊어버린다. 그리고 자신이 갖고 있는 달란트로 회상하고자 한다. 어떤 이에게는 순금33kg이요, 또 어떤 이에게는 거대한 제국이기도 하다. 반면, 예술가는 그 값어치를 치수로 환산하기에 마땅치 않은 미적 소산물로 환원시킨다. 예술은 애매한 간극에서 민감하게 떨리는 오이디푸스의 눈꺼풀과 다르지 않다. 정의는 “그 자체로”; 바로 그 개념에 있어서, 불의의 형식이며, “정당화된 힘”1)이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일반적으로 교환의 가치로 그것에 대항하며 비극을 자초하였다 한다지만, 실제로 갈등의 고리를 푼 것은 시각적 기능을 제거한 두 손가락이었다. 그 손은 자신과 이어진 기관을 파괴하면서 존재의 기억을 회복시킨다. 이것이야말로 상상력이며 인격화된 층위로 바깥에서 깃들어 고착된 내러티브다. 지극히 사적이면서도 지극히 비타협적이면서도 지극히 이기적이면서도 지극히 맹목적이기까지 하다. 역설적으로, 여기서 치료 비슷한 것이 싹 튼다. 이것은 상실의 떡잎이다. 상상력은 인식이 다가갈 수 없는 영역을 밝히며 오직 한 명만이 지나갈 수 있는 길로 인도한다. 절대자는 우리에게 오지 않는다. 단지 나에게 와서 나를 인도한다. 또한 하나의 씨앗이 한 그루의 나무를 키우며 다르게 씨앗을 떨어뜨린다. 거기서 실존이 나오며 실존의 도약이 이루어진다. 치료는 과거의 회기가 아니라 실존의 도약인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교환 불가능한 미적 소산물은 존재의 위치를 앞으로 이동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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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작업의) 완성의 그 날을 알 수도 볼 수도 없이 헤매는 오이디푸스와 같다. 쾌락의 단계는 유아적이고 윤리적 단계는 딱딱하며 무책임하다. 반면 그것을 넘어선 신앙의 단계는 체념을 통하여 실존의 역설을 가르친다. 미적이념을 추구하는 인간은 역시 스스로의 길을 잃어버린다. 붓을 버리고 작업을 하는 예술가가 예술가로서의 실존적 공포와 위기에 처함으로, 정확히 미적이념 앞에 단독자로서 자신의 실존적 존재를 파악하기에 이른다. 이는 매우 느린 바느질과 같다. 작가는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하여 자신의 작업을 기록한다. 그 기록은 차근하게 시간을 나열하는 훈련이다. 그렇게 완성된 것이 문법이며 언어다. 언어는 서로를 소통하게 하는 극히 중요한 도구다. 말의 유비로 인하여 ‘이데아’의 차이를  발생시키기도 하며 ‘세계관’의 상이성을 발견하기도 한다. 더불어 읽혀지지 않고 해석되지 않는 말의 방언들은 혼돈과 배교를 일삼게 한다. 그것은 불가피한 현상이며 정설이 된 과학이다. 이것에 인간은 아픔을 통각에 새기고 가장 확실한 환기(catharsis)를 불러일으키게 한다. 몸의 오염은 배설을 통하여 해결되는 것으로 감각은 감정과 이성의 배설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그 기관이 복작해 질수록 고등동물로 휩쓸리고 그 기관이 단순할수록 식물로 휩쓸린다. 따라서 동물이 하는 말과 식물이 하는 말이 다르며 그 기록의 방식 역시 다르다. 그럼에도 공통된 체계를 갖고 생명의 연장을 이어가고자 하는 영양기관 계와 생식기관 계는 어디에도 있다. 동물로 말하며 식물로 생각한다. 사건은 언제나 동물계에서 발생하였고 그것의 기록은 식물의 나이테에 압착되어 있다. 이것은 참으로 미적이다. 기록의 축적은 조용하게 이미지를 실존하게 한다. 식물은 그 현장에 있었으나 ‘말하지 않음’으로 과거와 현재를 포섭한다. 세대는 끊임없이 입에서 항문으로 이어져 내려가고 있다. 우리의 윗대 위리의 선조가 누구인지를 알고 거기서 개인의 위치를 찾는다. 거꾸로 생각해보면, 세대는 뿌리에서 시작하여 줄기를 타 오른다. 우리의 근원이 어디며, 열매로 개인의 소임을 다한다. 위에서 아래로 아래서 위로 시간은 두 가지의 방향성을 갖고 흐른다. 유일하게 예술가는 두 가지의 방향성을 동시에 기억하고 있는 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식물과는 다른 식물적이면서 동물적인 교태를 취하며 스스로를 열어젖힌다. 도륙의 현장에 떠나 있으면서도 기억의 실오리가 연결되어 재조합의 재생이 일어나고 있다. 미적의미다. 이는 지저분한 켄타우로스(Kentauros)의 교배가 아닌 선량한 자의 양심이고 느린 바람을 두 손(手)으로 담을 줄 아는 사람의 기술이다. 이 사람이 기억의 방에 들어가 하나의 서랍을 열고 닫는다. 그 방에서 나올 때 손에는 작은 물건 하나가 있었다. 반쯤 내려간 창문 사이로 빛이 자근하게 줄었다. 빛살이 방으로 숨었다. 절반은 보이고 절반은 사라진다. 사람은 손을 폈다. 그리고 줬다. 시선은 자신에게로 잠기며 하나의 구멍을 본다. 언제나 세상은 강요되지 않았고 약간의 사연을 하나의 서랍 속에 감추고 있었다. 지금은 차분하게, 쥔 손으로 ‘지워가는 글씨’를 쓴다. 손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단순한 일을 하고 있다. 그래서 정직하다고 말한다. 어쩌면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눈은 바늘구멍을 만들지 않고도 읽을 수 있는 능력으로 자만하게 보이기도 한다. 몸속에 깃든 허파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하며 숨 쉬고 있다는 것에 안타까이 여겨지기도 한다. 사람은 손을 폈다. 그리고 줬다. 각각의 서랍에 몸의 기관들을 넣었다. 그 방에서 몸의 기관들은 욕망을 놓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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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보이는 것은 동등한 격을 갖고 서로에게 말을 거는 일이다. - 정말이지 원래부터 우리는 그랬다. - 세포는 분열(division)하지 않는다. 또 다른 세포를 만나는 것이다. 욕망의 몸을 벗고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면 그 사실을 알게 되는데 신체의 중심이 머리에서 손으로 옮겨간 일이 얼마나 큰 사건이었나를 사람은 확인하게 된다. 더 이상 물리적 방향과 위치는 길을 풀고 사적인 역사의 개별들이 서로 유기(遺棄)하여 유기(有機)적 신체를 이루게 된다. 그것은 빛이 방안으로 들어오고자 하는 폭력성에서 빛살이 방안으로 숨은 인기척으로의 전이다. 읽을 수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읽으며 버리게 된 것은 자유한 일이다. 망각의 냇가에서 손을 씻는 일이란 비단 쓸쓸하지만 않은 것이, 오랫동안 여기 서 있던 나무가 착하게도 손을 씻었던 물을 흡수하고 푸른 잎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작년 봄에도 재작년 봄에도 반복되었다. 언젠가 소를 도살하여 각을 뜨고 갈고리로 꿰어 걸어 놓았던 적이 있다. 투명한 근육 덩어리를 지나 각인된 척주의 모습이 보인다. 이는 실존의 문제가 아니요, 유기적 기관들이 새로 쓰는 관계에 대한 연결고리의 관계성이다. 여기서도 역시 사람은 반복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으니, 기록하는 손은 밀고 당기는 경계에서 반듯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진정으로 새로운 그 무엇이 오직 반복을 통해서만 출현할 수 있다. 반복이 반복하는 것은 과거가 “사실상 그러했던” 방식이 아니라, 과거에 내속하며 과거에 현행되면서 배반당한 잠재성이다.’2) 그렇게 되어야만 과거를 서랍에 넣어 두고 새로운 그 무엇이 반복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잠시 따끔할 테지만 빛이 바늘구멍을 통하여 몸의 기관들을 비출 때 신체의 일부는 ‘신체 없는 기관’이 된다. 이것은 가상이 아닌 ‘잠재적 실재성’이다. 바늘과 실 그리고 부직포로 심장을 재생하는 차원에 멈추게 되는 것이 아니라 초월하는 지평이 드러나도록 재봉하는 일이다. 거기서 한 사람의 역사가 기록되면서 또 한 사람의 역사가 정리된다. 우주의 별자리는 우주의 기록이듯이 빛이 밀려오고 쓸려나가면 모레알들이 뒤섞여 동일한 지금(now)을 유지한다. 그것과 함께 사람은 미세하고 여린 바늘로 느린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제 작가의 손은 구체적인 그 무엇(신체를 형성하지 않으면서도 기관, 그 자체로 개별적이고, 구체성을 띠며 유기적 관계성이 확보되는 상태로서의 사물)에 절망하고 있는 것에 대한 치료의 손이다. 전혀, 미적인 것은 ‘이것이냐 저것이냐’3)라고 해답을 줄 수가 없이 절망에 관여하고 있다. 그것은 의지요, 그렇기 때문에 미적정화를 가능하게 한다. 의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절망에 대하여 긴장하고 있으며 인식의 최대 결과물인 언어와 문법에 관하여 역설하고 있다. 글자를 쓰고 안 쓰고는 손을 펴고 쥐는 것과 같은 의지의 문제다. 식물은 스스로의 의지로 발을 땅에 심었고 손을 빛에 향하게 하였다. 이처럼 바늘은 그 무엇을 재봉하여 땅에 묻어 둘 것과 하늘에서 올 것에 대하여 포악한 육식동물의 가죽을 벗어 던졌다. 사람이 가죽을 벗을 때, 미적인간이 될 때가 아닌가.

1)슬라보예 지젝, 신체 없는 기관, 도서출판b, 2008, p. 79 인용

2)슬라보예 지젝, 신체 없는 기관, 도서출판b, 2008, p. 34 인용

3)쇠얀 키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관점, 다산글방, 2007, p. 192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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