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magazine vol.20

작가_지노 | 막몽에서 깨어나지 못한 시인 | 글_김용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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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극히 감상적인 나머지 원작을 대변하지도 비판하지도 않는 비평으로 어떤 이에게는 불필요하고 또 어떤 이에게도 불필요할 수 있는 글이다. 단지, 이 서술은 그러한 방식이 원작의 미묘함에 교차되는 것 같아 약간의 친분으로 저자의 동의 없이 쓴 내용이라 하겠다. 어차피 작업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나 작가에 대한 언급이 없으니 무슨 얘기를 지어내도 상관은 없지만 그렇다고 결코 상관이 없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작품으로, 작업으로 독립될 수 있다. 독립된 공간, 구별된 시점이 차이를 불러일으키고 원작에서 파생되는 다양한 원작들을 허용하게 된다. 안에서 보는 것과 바깥에서 보는 것이 여기 있다. 사실은 이미지에서 만나니 그게 그거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해보지만 맞물리는 이미지가 미묘하니 요지는 이렇게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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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땅이 접하고 있는 곳에 이야기를 짓는 벙어리가 살았다. 나면서가 아니요, 스스로 말을 잃어버린 사람이었다. 그의 얘기는 거울로 자신의 그림자를 보는 듯 신기했고 기묘했는데, 언제나 한 밤 중에 깨서 꿈을 그리는 것으로 시작되곤 하였다. 이야기는 어둠 중에 눈을 떠 어둠 중에서 흘러나오는 섬세하게 섬뜩한 어둠 중의 장면이었다. 무엇인가 느낀 바 있었고 무엇인가 연상된 바 있었지만 어둠의 반복이 같지 않음을 발견했을 때 단지 증환(sinthome)이라는 사실에 그는 무덤덤해 있었다. 대기가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지점에 이르렀다.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없는 ‘시간의 틀’이었다. 여기서 ‘시간의 방향’은 길을 잃고 있었다. 헤매는 시선은 공포에 사무치기 시작했고 긴장을 하면 할수록 실재의 탈출구를 놓치고 있었다. 누군가 빨간 실타래를 던져 놓았을 법하지만 애당초 ‘시간의 틀’이라는 것은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 하염없이 빛이 있는 통로 쪽으로 향하는 데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은 서서히 찾아온 두려움으로의 전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고 순식간에 자신의 위치를 잃어버린 공포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두려움은 감옥에 갇혀 그 안에서 허덕인다. 허덕임은 벗어나야 갰다는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드디어 탈출하는가 하지만 젊은이는 늙은이의 교훈을 쉽게 잊어버린다. 다행인 것은 아직 우리에게 해가 오지 않았고 일방적인 방향 안에서 선택할 수 있는 통로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 실타래가 떨어져 있었다. 실타래는 깃털처럼 빼곡하며 선과 패턴으로 얽혀 있었다.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감겨 있는 타래 사이로 손이 보인다. 마치 밀랍이 고열에 축 쳐진 것처럼 예전에 그 손은 녹아 흘러 내렸었다. 어떻게 보면 욕망은 하늘로 향하고자 하기보다 깃털로 자신의 몸을 장식하는 일에 열중한다. 새의 깃털을 갖게 된다면 ‘시간의 틀’은 ‘틀의 시간’으로 전위될 것이다. 하늘로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본다. 분명 저곳은 미궁이었다. 그렇다고 하늘 위로 올라갈수록 명쾌한 것은 없다. 이것이 발명의 한계며 모방의 허점이다. 보다 더 과거로 돌아가 보면 ‘시간의 틀’은 텅 비어서 재현될 뿐이었다. 원래 몸이 갖고 있는 비어 있는 기억이다. 그 기억은 한 사람의 퍼포먼스와 같다. 영원히 죽지 않는 자, 그래서 설명하기 힘들고 시간을 낼 수 없는 서사였다. 어떤 실마리를 잡으려하는지, 남자는 어떤 공간에 잡혀 있다. 언어화 될 수는 없지만 무엇인가 있는, 있다는 것에 대한 불편한 꿈이다. 꿈은 눈을 감고 보는 것이다. 빛이 필요 없다. 시간도 공간도 중요하지 않다. 그렇다고 환각도 아니며 참도 거짓도 아니다. 현실과 얽혀 있으나 그렇지 못하고 우리와 전혀 무관한 세상 밖의 개입도 아니다. 악몽은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무엇이 불편하게 하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생각하지 못하는 단계다. 꿈속에서도 우리는 생각을 한다. 그 생각은 꿈속에서 현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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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현실화 중에 미처 생각하지 못한 현실화는 우리에게 공포를 주며 악몽으로 여기게 된다. 무엇이 현실화 되었는지 무엇이 현실화 시켰는지를 알지 못한 채, 불쑥 달마의 존재가 등장한다. 그는 역사적인 인물이지만 그 행보가 기특하고 신비롭다하여 확연무성(廓然無聲)이다. 생각 속에 생각이 없음. 서사 속에 서사가 없음 혹은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순서의 방향은 또 다른 방향성을 갖고 스스로를 교차하며 지나간다. 그래도 한 번쯤은 과정이 있으니 그것이 불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어느 날, 정확히 어느 때, 쑥 캔버스에 등장한 그 모습은 안과 밖도 없었으며 밝음도 어둠도 없었고 언제인지도 모른 곳에서 불쑥하니 얼굴을 들이밀었던 것이다. 신화의 얘기에 던져진 실타래가 바로 이 사람의 면전에 도달하였다. 강한 색채와 장식화 된 얼굴의 구석구석이 현실의 땅에 발을 내딛는 듯하였다. 손에 잡힐 것 같은 바로 그 빛의 실타래. 정신적이고 비질료적인 그 빛이 어느 순간 물질이 되는 때, 그 때가 도래하고 있었다. 여담이지만, 예술가는 그 어떤 일에도 구체적으로 측근으로 개입하지 않고 그 주변에서 힘들게 참여하고 있다. 예술작품에 대한 소외된 최초의 계층이자 영원히 버림받아 절름발이로 살아가는 헤파이스토스와 비슷하다. 무엇인가 알게 되면 그것은 저 멀리로 도망가 버리며 거주하지 않는 주민등록상의 주소지처럼 지식으로 발견될 뿐이다. 그에게 있어서 훈련과 반복은 환상을 밀도 있고 완벽하게 재현하는 일이 아니다. 직관 없는 사유는 공허하고 사유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라 하지만, 맹목적인 것이 공허함으로 달리고 있으니 피치 못해 훈련과 반복을 할 뿐이다. 어두운 공간에 순식간 예리한 칼에 의해 꽃이 반쪽 날 때, 파르르 하게 흔들리는 모양이 예술가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거기엔 그 어떤 인과관계도 없기 때문이다. 잠깐 떠오른 기억이나 사념에 의해 스스로의 일을 만들어 가는 것이 예술가의 단면을 증명하고 있다. 달마는 무제와 불필요한 대화를 한 후 홀연히 갈대를 타고 양자강을 건넜다. 알지 못함을 알고 있다는 사실은 자신을 대면하고 있는 현실에 초연해 지며 스스로를 작품이라 하는 것에서 떠나게 된다. 무제는 최고의 성인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달마가 세상에 성인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끝내지 않기 위해 그 곁을 떠났다고 하면 서로 기분 좋은 결론이다. 이렇듯 예술에 속하는 작가나 작품과 같은 범주들은 그 층위가 분명하면서도 그 경계가 애매하다. 모두가 작가라 칭할 수 있고 모든 것이 작품의 가치를 충족한다고 할 수 있다. 먹과 붓으로 단번에 달마의 모습을 그리는 것과 다양한 색채로 다양한 풍경들을 얼굴 속에 솎아 넣은 모습은 예사롭지 않은 달마의 출현과 차이가 없다. 불변하는 것이라면 그것이든 저것이든 달마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것이던 저것이던 예술의 범주 안에서 예술 활동이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은 예술가든지 아마추어든지 간에 부인할 수 없는 지점이다. 그럼에도 작품과 상품을 구분하고 작가와 아마추어를 구분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 또한 예술 활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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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의 예술가와 그의 가족은 오래전에 폐허가 된 담배공장에 갔다. 거기서 그는 세 가지의 실험을 한다. 공간에 어둠을 채우는 것, 공간에 연기를 채우는 것, 공간에 빛을 채우는 것. 이것은 이카로스의 아버지가 발명가라는 사실에 퍼포먼스가 개입되어 서사적 공간으로 변화되는 ‘예술 활동적인 너무나도 예술 활동적인’ 방식이다. 사적인 인간의 활동이 예술 활동으로 전이되는 시점은 신화를 읊조리는 눈먼 시인의 입술과 같다. 빛을 보고 있으나 어둠 중에 있으며 질서의 언어를 전달하나 흑암의 혼돈 중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다. 결국 거기(중간지대)를 빠져 나가는 방법은 새의 날개를 따라 만들어 하늘로 탈출하는 길 뿐이다. 하지만 그 어떤 접착제도 태양의 빛을 이길 수 없으니 다시 땅으로 떨러지고 만다. 애초에 인간은 중력을 벗어날 수가 없다. 다만 하늘을 나는 그 순간 이카로스는 희열을 맛본다. 담배공장의 모든 창문이 닫힐 때 빛은 촉각적인 한 가닥 물질이 되어 예술가의 손아귀에서 맴돈다. 그 때의 희열은 아폴론을 피해 도망친 다프네의 역설이다. 질서요, 언어인 어떨 때는 그 맘대로 해석하여 그 스스로 법이 되는 아폴론이 한 줄기 물질이 돼버린 까닭은 어쩌면 어둠을 피해 창문을 가려가는 작가의 엄습에 당한 꼴이다. 여기는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잠시지만 구청의 허락을 통해 내가 의미를 부여하는 곳이다. 그 의미는 세상의 모든 이미지가 물구나무를 서는 것이며 물질의 공간은 실제로 뒤바꿔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작가는 거기서 불과 연기의 장난을 하기 시작했는데 인간이 빛을 취할 수 있었던 최초이자 유일한 활동이 불을 피우는 일이었다. 세상에 주어진 빛이 차단된 어둠의 공간에 작가는 두 가지의 얼굴을 갖고 스스로를 악몽으로 빠져들게 한다. 세상에 주어진 시간의 틀을 휘장으로 둘러치고 일시적이나마 빈 시간이 된 여기도 저기도 아닌 공간에서 작가의 몸은 시를 부른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며 신의 현현을 흉내 낼 수 없는 우상이다. 미노타우로스(Minotauros)가 보인다. 얼굴은 새며 몸은 인간인 모습을 하고 있다. 그는 공간이란 미궁에 빠져 모두에게 버림받고 욕망의 한을 풀고 있다. 원래 우상은 이런 의미였다. 다르게 말하면 거울 속에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이다. 좌우가 바꿔 있는 자기 자신은 왼손잡이다. 왼손잡이인 자기 자신을 보며 우리는 자각한다. 빛의 자각은 빛의 역설 속에서, 어둠의 자각은 어둠의 역설 속에서 확연해 진다. 이것이 우상의 기원이었다. 우리는 하나쯤 우상을 갖고 있다. 도저히 자기가 소유하고 있거나 욕구하고자 하는 것을 포기 못하는 것이다. 그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워 작가는 미궁 속으로 들어갔다. 욕망의 욕망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공간의 벽에 배인 환각제를 공간에 끄집어내는 일이다. 썩지도 않기에 죽지도 않는다. 반은 어둠에 묻혀있고 반은 밝음에 묻혀있다. 드디어 공간은 확연해 지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공간에 빛의 출입을 허용했다. 저기 저 새가 날아와 여기로 앉은 것처럼 말이다. 인간은 참으로 서사적이며 감성적이다. 분명하고 진리인 곳 저편에 놓인 세상을 등으로 가리고 있다. 동시에 두 곳을 바라볼 수 없지만 자칫 우상이 스스로 타락하여 신의 모습이고자 할 때의 쾌락은, 어느 선까지 모든 존재의 의미를 잠시 반사시킨다. 그곳을 탐색하는 일 수백 년이 넘는 신들의 전쟁에 죽어간 인간적인 자취를 찾아 고리와 고리를 엮고 개념화 시킨다. 그 경계에 인간의 몸이 있다. 그리고 인간의 행위가 있다. 짐작컨대, 과거에 묻힌 현장을 교접한 행위로 둘러보며 지팡이를 짚는 일은 비로소 환상이 상상의 땅에 정착하였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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