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ase Transition - Yen Sik Kim

조회 수 2800 추천 수 0 2010.11.03 00: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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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그것이 불안이었다 해도…….

 

 

어느 산자락에 구름의 그림자가 드리웠습니다. 거기에 사는 사람은 참 시원하겠습니다. 구름이 움직이면서 그림자도 이동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움직입니다. 한 번에 모두를 햇빛으로부터 가릴 수 없기에 그런 것 같습니다. 그 구름 그림자는 착합니다. 대기에 적당히 떠서 태양과 사람을 화해시킵니다. 가능하다면 저 구름을 한 번 잡아보고 싶은데 땅 위에서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나 봅니다. 살며시 퍼지는 구름의 옷이 파란 하늘로 녹아 그렇게 하늘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태양에 의해 데워진 구름의 뒤편을 보며 이제 지나쳐간 목마른 고통의 끝자락만을 회상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구름이 주는 그림자, 그곳에 사연이 있습니다. 그건 기쁨도 고통도 언급되지 않는 그 아무것도 아닌 무념무상의 이야기입니다. 사실은 아무 게도 아닌데, 아무 게인 것처럼 여기에 있습니다. 그 구름도 그 구름의 그림자도 정말이지 잡히지 않는 조용한 존재인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해를 주지 않고 실증적이길 원하는 우리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은 과연 기적입니다. 구름 그림자가 하염없이 머리에 떠오릅니다. 구름은 구름의 그림자를 내었고 구름의 그림자는 우리 안에 갇힌 시선에로 다시 한 번 그림자를 내었습니다. 힘을 주지도 않았는데 그 모습 진하게 남아 있습니다. 산 위에 머물러 있었다는 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었는지 다시 고민해 보게 됩니다. 처음 구름이 보였습니다. 혹은 구름의 그림자가 먼저 보였는지도 모릅니다. 처음엔 그것을 의식했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의식하지 않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거기 있음', 그리고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 사실이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생명이 없는 구름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그림자가 그 모습을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그건 확신하건데, 거기엔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보지 않아도 의식하지 않아도 그냥 있는 것입니다. 산이 슬기롭게 느껴집니다. 구름의 그림자를 사심 없이 받아 주기에 말입니다. 인간이 모르는 어떤 대화를 이미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생물학(Species)의 구분에 따라 언어가 흐려지고 말았지만, 언어 이전의 대화는 사람이 사자와 어린양들과 얘기를 나누던 말이었습니다. 잊힌 대화를 사람들은 기억 속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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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그런 흔적을 지나치게 되면 눈이 밝아지고 무뎠던 당신께로의 감정이 말랑말랑해집니다. 더 이상 본질을 쫓는 것은 무의미 합니다. 구름이 그러하듯 그 현상이 그림자를 드리웠듯이 지금 여기에서 발생하고 있는 피어난 구름과 산에 걸쳐 있는 그림자가 감격스러운 것입니다. 우리가 그 상황을 보게 되었다는 점이 운명과도 같고 알지 못하는 질문 더미에서 저만의 준거를 찾아야하는 작금에 큰 위로가 됩니다. 개입되어 있지 않으면서도 관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그림자가 가지고 있는 비폭력성이요, 지혜로운 개입입니다. 뭇사람은 예술작품을 그림자에 비유합니다. '그렇다면 그 본질은 무엇이겠는가.' 하며 인식의 촉수를 빼냅니다. 마치 면도날 같은 칼을 들어 섬뜩하게 달려드는 강도들 같습니다. 혹시나 그들이 아주 오랫동안 그림자를 훔침으로 우리의 정서를 단속했는지 모를 터입니다. 기실, 깨닫는 게 있으니 '그림의 사람'입니다. 그린 사람 혹은 그려진 사람이 하나가 된 자리입니다. 그게 여태껏 우리와 상관없이 변치 않고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그 모습을 우리의 손에 펼쳐진 작품에 비유할 때입니다. 그림자의 주인은 이내의 몸과 같은 실체가 아닙니다. 그 말 자체가 오류입니다. 그림자는 빛이 있었기 때문이며 그렇게 해서 드러난 존재입니다. 실체에게로 왔지만 실체와 무관합니다. 그렇다면 그림자, 풀어서 ‘그림의 者(사람)’은 ‘그림의 주인 혹은 종’을 지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작품은 작가에게로 왔지만 작가와 무관한 것입니다. 작업이라는 맥락에서 보더라도 예술가들은 작품에 관한 방관자거나 청소부에 가깝습니다. 평면에 공간의 환영을 만들어낸 천재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걸작을 보더라도 액션페인팅으로 유명한 잭슨 폴록의 무제를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예술가들은 결코 응시하는 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 개입이 적극적이던 간접적이던지 간에 작품을 대상화 하는 관계에서는 또는 작품 속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방관자의 역할을 하거나 그 모든 사건들이 끝난 후에 청소부의 역할밖에는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화가가 명암법, 원근법을 발견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붓을 들고 캔버스에 형태와 색을 바른다 하더라도 그것은 한갓된 기능(function)의 변화현상에 불과합니다. 화면 속으로 들어간 잭슨 폴록의 작업도 엄밀히 따져보면 이미 개입을 하게 될 때, 화면은 가장 안전한 상태인 것입니다. ‘플럭서스’나 ‘해프닝’도 비슷한 메타포로 논쟁거리가 됩니다. 거기엔 존재자적 작품의 부재로 ‘작업 자체’가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해서 누구도 일방적인 주인으로, 소유자로 관여되지 않는 ‘원래의 예술’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여기에 몽당 파스텔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는 도구입니다. 이것을 불에 녹입니다. 그 말은 물성으로 본다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 적당한 시기에 불로 녹이는 일을 그만두고 경과된 이미지를 고착화 시킵니다. 이는 어떠한 사태가 있어서 작가로부터 기소된 시점입니다. 작가는 파스텔을 집어서 어떤 판에 배열합니다. 그리고 버너에 불을 댕기는 동작을 취합니다. 한 동안 후에 작가는 불을 꺼서 작업에 대한 구실을 다합니다. 물론 작가의 노동과 시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우리가 우리의 그림자를 어찌하지 못하면서도 하나의 존재하고 있는 것과 같이 설명되는 게 신기할 따름입니다. 더욱이 그 변화되어가는 과정을 영상화 시켰다고 했을 때, 그 매체는 명백히 작가가 방관자였다는 증거물이 되는 것입니다. 구름 그림자가 구름 없이 있을 수 없으면서 구름으로부터 무관한 것처럼, 어떤 이미지로 배치된 파스텔이 녹아가고 있는 광경은 그냥 그 스스로의 양상이 변화하며 전개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어떤 법칙이 있느냐, 어디로부터 왔느냐, 왜 녹느냐와 같은 질문은 딱히 소용도 없고 할 말이 없습니다. 산에 깃든 그림자가 나무와 나무 사이에 서려 들면서 움직이는 것처럼, 화면 이미지는 열의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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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측면에서 그림자는 빛과 친하고 이미지는 ‘사건’과 친합니다. 나는 목격자입니다. 정확히 표현하면, 나는 구름 그림자를 보았습니다. 그 사실이 경이로웠습니다. 그래서 보았고 그래서 언어로 생각해 내기 시작했습니다. 예술작품은 어쨌거나 이미지며 이미지로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은 예술작품의 본질이나 의미, 내용을 앞서는 ‘어쨌거나 있음(있었고 있다는)’의 사건입니다. 작가도 그 형편을 보고 관객인 우리도 그 모양을 봅니다. 하지만 아무 게나 아무 때나 목격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목격자는 불현듯 자기의 동의 없이 발생된 상황을 본 것입니다. 나는 문득 구름 그림자를 보았습니다. 그때의 상태를 고민해 보니 나의 이성도 나의 의식도 결여된 순간이었습니다. 그 순간 비로소 구름 그림자의 얼굴이 밝히 드러난 것입니다. 또한 그 순간은 언제나 처음에 있습니다. 한 처음 가장 명확했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연기(緣起)되어 그 실상이 혼돈 속으로 빠지게 됩니다. 그런 방식으로 예술작품은 완성을 취하게 됩니다. 모든 것이 젖어들어 색들이 뒤엉킵니다. 그것은 결코 그렇게 좌절하게 만든 그렇게 절망하게 만든 필연적인 결과로 볼 수 없습니다. 가랑비에 옷 젖는 게 이미지의 붕괴나 이미지의 공황을 부추겼다고 설명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논리입니다. 거기서 끔찍이도 주시해야 하고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맥락은 그림자였다는 사실입니다. 녹은 것은 이미지가 아니라 몽당 파스텔들이 녹은 것이요, 우리가 체험한 경이로운 사건은 녹아내림으로 인해 소급되어 하나의 작품이라 일컫는 이미지가 반추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혹시 그것(구름 그림자)이 불안이었다고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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