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중, 문득 들리는 소리 있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더니 숲을 가로지르던 바람 소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 어제 들었던 소리는 숲이 되어 오늘에 겹치고 오늘은 다시 어제의 깊은 계곡으로 숨어들어 간다. 작아진 나의 모습이 달과 함께 그 숲 표면에서 비치고 있다. 정확하게 어디에서 반사되고 있는지 알 길은 없으나 숲이 건네준 성실함에 깊은 감명을 표하고 있다. 오솔길을 따라 또 오솔길을 따라 시선은 산책을 시작한다. 이제는 발견자의 모습이 아니라 여유롭게 주변을 받아주고 그 속에 얼굴을 담는 검은 숲이 되었다. 숲이 있다는 건 숲이 있었다는 것이요, 그 숲은 어디로부터 있었다는 것이다. 누가 숲을 만든 게 아니라 그것이 숲이 된 것이다. 그 순간은 바로 다른 장면으로 바뀌어 물리적인 거리감이라든지 고체화된 부동의 사물이라든지 하는 것을 넘어서는 얘기가 되었다. 그 안으로 들어간다. 혹은 그 밖으로 나온다. 거기가 원래 안과 밖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시간의 층이 마치 공유하는 공간을 보여주는 척하기 때문이다. 그 착각은 착각할 만큼 물리적으로 조밀하다.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는 그것을 사이공간이라고 부른다. 한 번 더 안과 밖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 내용은 실로 몸을 가진 시선이 화면의 표면이나 깊이로 이동함을 가리키지 않고 세계의 다른 장면, 다른 위치로 넘어서고 있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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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여인의 머리카락이 숲과 같은 울림으로 보이더니 어느 날 시선은 그 숲에 있었고 또 어느 날 그 시선은 그 숲과 숲 사이에 있었다. 허나, 그 시선이 두 단계의 깊이로 들어갔다 하여 보다 더 본질적이거나 근원적인 관념에 가까워 진 것을 언급하지 않는다. 다소 차이가 있다면 문득 거기서 소리를 들었다는 게다. 그 소리가 자신의 손끝에서 진행된 소리와 일치하기도 했었고 그 소리의 가닥이 색을 얻어 누구나 손쉽게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게다.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일이라는 건 그 소리는 향기라 하였다고 하는 기억일 게다. 뜻밖에 익숙한 것으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게 되었을 때, 우리의 몸을 숙이고 그 속으로 들어간다. 새로운 광경이 펼쳐졌다. 하지만 원래 보던 익숙한 풍경이 집중되고 확장된 것이니 낯설지 않게 사람과 숲은 장소의 공통된 어머니를 품고 있었다. 바로 내가 그 사실을 자각하게 되는 지점이 나의 마음의 문을 열게 한 것이다. 기대하지 않던 곳에 해갈의 폭포가 흘렀다. 그것이 보였고, 이것을 어떻게 표현하고 설명해야 하는지 수 해를 고민했었다. 처음 그 고민은 서툴러서 그 현상만을 가지고 증명하려 급급했었다. 정말이지 망설였었다. 허나 세상은 진위를 따지고 추론하여 납득이 간다고 하는 명제로 서술할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본다고 하지만 우리의 시력은 잘해봐야 2.0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혹시 보는 것처럼 간주하고 공간의 크기와 깊이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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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엔 나무가 있다. 나무들이 스스로를 숲이라 하지 않았는데, 그 누가 숲이라고 했다. 참말로 객이 주인이 된 꼴이다. 그래도 숲은 너그러워서 우리의 한계로 하여금 우리의 눈을 밝힌다. 거기에는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사람도 있는 것도 아니다. 모두가 있다. 바다 건너에 사는 사람들은 사람만을 생각하여 모든 중심을 사람의 머리에 일치시켰다. 그리고 아주 한동안 세상을 착각하게 만들었다. 그것이 우리의 관점이라고 직언하면서. 이로부터 비롯된 공간은 ‘허상(虛想)의 주인’의 들러리가 되어 허무맹랑한 권위로 조성된다. 결국 ‘평면에 공간은 없다. 물성 그 자체다.’ 그들은 이정도의 이해를 통념으로 하였다. 절대로 협동하지 않고 차갑게 분리되어 ‘유사 유물론자’가 된 것이다. 우리의 눈이 두 개인 것이 단지 하나의 시각으로 세계를 보는 것에 반증이며 대상화 하는 과정 중에 줄을 서게 하지 않는 수평적 시선이다. 뒤로 갈수록 사람도 사물도 공간도 작아진다. 더불어 그들의 권리도 품위도 작아지게 된다. 그러니 외눈박이는 세계를 조정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러한 태도가 현실 밖으로 나와 기술과 손을 잡아 없어도 될 외발이 이념들을 생산해 내게 된다. 이때껏 우리가 그 사실을 몰랐던 까닭은 우리의 근원이 원래 단수가 아니라 복수(plural)였다는 사실을 망각했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개벽하는 일들이 아주 가까운 주변에서 발생한다. 새싹이 돋는가 하면 어느새 낙엽이 떨어지고 있다. 시간의 길이는 우주의 별이 움직이는 것처럼 정확하지만 그 길이는 순간 길고 순간 짧다. 전혀 한 뼘의 나무자로 잴 수 없는 것을 멀리서 온 사람들은 복음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순간 바뀌는 심상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고작 하는 게 무의식으로 도망친 초현실주의자들의 ‘꿈의 해석’이다. 그 심상은 상상이 아니다. 여인의 뒤태에서 폭포가 떨어지고 있다고 상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심상은 마음에서 작용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마음은 눈을 가지고 있다. 그 눈은 전체를 받아들인다. 그러면서 떠오르는 상이 바로 심상이 된다. 사람에서 떠오른 숲은 다시 숲에서 떠오른 사람이 된다. 어둠 속으로 들어간 색은 다시 색으로 들어간 어둠으로 잇는다. 그럴 때 바닥에서 소리가 떠오르고 안쪽과 바깥쪽은 바깥쪽과 안쪽으로 일을 시작하게 된다. 사실 왼쪽 눈과 오른쪽 눈으로 번갈아가면서 대상을 보는 것처럼 거기에 순서는 없다. 돌을 깨면 우주의 단면이 나온다. 거꾸로 우주를 깨면 돌의 단면이 나온다. 그 단면을 펼쳤을 때, 거리가 없는 틈이 보인다. 무엇인가로 채워도 틈이며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우지 않아도 틈이다. 그 틈에서는 공간을 보는 방식이 우리와 다르고 세상을 전개해 나가는 입장도 우리와 틀리다. 그렇다하여 틈이 우리와 무관하다 하지 않고 그 속에서 선을 긋는다. 선을 제거하지만 다시 채워 비움과 채움의 주고받기를 반복하게 된다. 그것이 단지 선으로 그칠 수도 있고 여러 층에 걸쳐 다발로 묶길 수도 있으며 머물러 있으면서 동시 흘러가는 시간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세계가 어쩠냐는 질문은 그 질문을 던진 사람의 믿음이 무엇을 향하고 있느냐에 달렸다. 어떤 이는 세상의 근원은 물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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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증기가 되어 운동하게 되면 끊임없이 운동하고 있는 세상이 된다. 또 어떤 이는 세상이 전혀 생성과 변화를 하지 않는 그런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변화되는 세계 너머의 불변하는 존재를 사유할 수 있을 것이라 한다. 여기서 가타부타는 의미가 없다. 그것에 매이게 되면 외눈박이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밤중에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듯이 화면이 요구하는 대로 화면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문득 보았다. 그리고 문득 시야가 넓어졌다. 그러한 체험에 우리의 믿음을 맡겨야 한다. 전체를 보면 시끄러운 소리가 있지만 그 개별은 홀로되어 입이 없다. 그러니 벙어리 된 선들이 아우성치는 꼴이다. 고요한 자리다. 서양과 동양을 분간할 수 없는 홀로된 자리다. 세계의 방향성이 없이도 세계의 위치를 적확하게 재현하고 있는 곳이다. 우리는 그 정면을 본다고 하지만 이미 그 전체의 방향으로 보고 있는 것이요, 가냘픈 공간성도 평면성도 아닌 낱낱과 다발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 속에 숨은 자들의 시선과 이곳의 경계가 흐르는 물의 결정체로 서로를 투영하고 있다. 물의 결정체 뒤로 몸을 숨겼지만 깊은 어둠 속에서 배여 나오는 모습을 단색의 논리로 감출 수 없다. 그 조차 실재이기에……. 여기 한 여인이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지나간 자리에 머리카락이 떨어져 숲이 된다. 그 숲에 여인은 몸을 감추고 숲이 된다. 그 여인은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의 앞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것이 아련한 연민이었다면 쉽게 허구였다고 말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간혹 보여줄 듯 말 듯, 보일 듯 말 듯 하기도 한데 숲 사이로 물이 흘러 고요한 시끄러움이 있을 때 시선 깊이 침잠하는 마음이 어느 한 가닥의 선에서 맺히고 있었다. 분명 그것은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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